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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무튼... 빨라야..
by John at 12:32 네... by John at 12:30 수고하셨습니다;;; by 콜드 at 07:38 포멧해서 다시 그려야 .. by 정착하는 인간 at 11/30 원래 저런 용도는 아니.. by John at 11/30 아하;;;;;; 그런 용도 였군요;;; by Ferederica at 11/30 dongha9318@naver.c.. by ㅁㄴㅇ at 11/29 ㄳ해요 재가 John을 Jh.. by ㅁㄴㅇ at 11/29 절망하지마세요. 다음.. by 므쯔소년 at 11/29 꺄악!!! 오늘 올라오지 .. by 므쯔소년 at 11/29 |
오늘은 제가 속한 동아리인 고려대학교 원불교 학생회(약칭 고원회)의 창립 45주년, 재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창립제가 열렸던 날이었습니다. 장소는 공학관 566호... 즉, 소위 말하는 공학관 강당에서 열렸었는데, 원래는 좀 다른 장소를 빌리고 싶었지만 연말이다 보니 녹지 운동장이나 화정 체육관, 4.18 기념관, 인촌기념관 등등의 건물을 대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데다, 고원회 담당 교수님이 기계공학과 교수님이신 최영돈 교수님이셨기 때문에 이공계 캠퍼스에서 좀 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창립제는 3시부터 열렸습니다만 그 동안에 준비를 하기 위해서 10시까지 학교로 가야 했습니다.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 미리 준비한 음료수와 간식, 동아리 회보, 준비한 선물 등등을 공학관으로 옮기고,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 공과대학 캠퍼스 내에 표식을 붙이기도 하고, 창립제가 열릴 공학관 강당에도 이것저것 배치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창립제에는 고원회를 다녔거나,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셨으면서 원불교와도 인연이 있는 선배님들, 그리고 고원회와 관련이 있는 교무님('교무'는 원불교의 성직자를 칭하는 말입니다.)이 약 40명 정도 참석하셨습니다. 일가족까지 포함하면 60명 가량은 넘었던 것 같군요. 찾아오셨던 분들 중에서 아마 사회적으로 가장 유명하신 분은 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이신 김성곤 의원님일 겁니다. ![]() 최영돈 교수님과 김성곤 의원님 이외에도 고원회 창립과 관련된 선배님들이 축사를 해 주시더군요. 뭐, 아무래도 고대다 보니 라이벌격인 연대에 대한 장난스러운 말 들도 나왔는데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거였죠. "고대의 상징인 호상(호랑이 상)의 시선은 태평양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건 고대가 앞으로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한 원대한 포부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연대의 상징이 뭔지는 알고 있으시죠? 네, 독수리 상입니다. 이 독수리 상의 시선은 이대를 향하고 있죠." 이 발언이 나온 순간 강당 내부는 폭소로 가득 찼습니다. 뭐... 발언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맙시다. 고대 출신의 사람들끼리 농담 따먹기 식으로 하는 말이니까요... 창립제는 6시 정도가 되어서 끝났고, 이후에 만찬이 열렸습니다만... 저는 과제가 있어서 좀 빨리 나왔습니다. 뭐, 때문에 이번 주 무한 도전을 생방송으로 보지 못하는 비극이 벌어졌다는게 좀 아쉽군요. 인터넷 뉴스만 보면 정준하와 관련된 일이 좋게 마무리가 된 모양이라면서 호평을 하는 걸 보니 더더욱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내일 쯤 하나tv로 봐야 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무리로... 저녁 식사를 했던, 고대 이공계 캠퍼스 후문에 위치한 '동태사랑'이라는 음식점의 화장실에서 찍은 짤방감 사진을 보여드리죠. . . . . . . . . . . . . . . . . . . . . ![]() * 제 76화 : 재계약. 최근 1년동안, 루이즈는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된 데에는 루이즈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무모한 행동을 했던 경우도 있었고, 앙리에타가 힘든 임무를 부탁하는 바람에 그 수행 과정에서 목숨이 위태로워졌던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위험스러운 상황을 겪으면서도 끝내 루이즈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파우스트가 늘 곁에 있었던 것이다. 파우스트는 루이즈가 뭔가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늘 못마땅하다는 듯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투덜거리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일단 일이 시작되면 그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힘이 되어줬고, 위급한 상황이 되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런 파우스트의 고생이 있었기에 루이즈는 별 달리 부상을 당하는 일도 없이 지금껏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 파우스트에게 루이즈는 딱 잘라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늘 고맙게 여기고 있었고... 그녀가 허무의 힘을 각성하는데 그의 도움을 받은 뒤부터는 여성으로서 호감을 품기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상황이 달랐었다. 늘 곁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루이즈를 지켜줬던 파우스트는 곁에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어버렸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애당초 지금 루이즈가 여기까지 온 것도 파우스트의 시신이라도 수습한 뒤 제대로 장례라도 치뤄줄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력한 가고일들을 1백 기 가까이 거느리고 있으면서 자신이 허무의 사용자라는 사실까지 아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적대적 행위를 하려고 위협을 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자신이 상대에게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도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붙었다가 말려든 세실리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루이즈도 지금 만큼은 도저히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루이즈가 이제는 정말로 죽을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순간... "멋대로 사람을 죽이지는 말라고, 이 멍청아." 몇 가지 징조(엠플리파이 데미지 저주, 스켈레톤 워리어들)에 뒤이어 들려온 그리운 목소리와 함께,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파우스트의 뒷모습이 루이즈의 눈 앞에 나타났다. 복장은 뭐라고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괴악했던 센스의 옷(...)이 아닌, 그냥 평민들이 입을 정도의 평범한 것으로 바뀌어있었고, 뒤로 넘긴 은발 역시 많이 길었던데다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주지도 않았지만, 가냘프게 보이기까지 한 몸의 실루엣이라거나 잊을 수 없는 특유의 목소리는 틀림없는 파우스트의 것이었던 것이다. '죽은 줄 알았는데...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살아 있었구나...! 그리고, 또 다시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 이렇게 나타나줬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기분으로 인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쁘기는 했지만, 일단은 지금 당장의 위험 요소인 가고일들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파우스트가 온 이상 질 리가 없다고 자신감을 얻은 루이즈는 파우스트가 가고일들의 진격을 막아주는 동안 허무의 주문 '디스펠 매직'을 끝까지 영창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모든 가고일들은 무력화 되었다. 셰필드 역시 더 이상의 공격을 가하지 않고 도주함으로서 위험한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 어라?" 파우스트가 고개를 돌려 루이즈 쪽으로 보여준 순간, 그녀는 당혹스러운 기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던 얼굴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지옥의 군주들과의 사투를 겪고, 그 뒤로 '네크로맨서 사냥'으로부터 도망쳐야만 하는 신세가 되어 극심한 고난을 겪던 시기를 겪었던 탓에, 파우스트의 외모는 불과 1년을 조금 넘기는 시간만에 눈이 파이고 광대뼈와 턱뼈가 불거져 나올 정도로 심하게 야윈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도저히 좋은 인상을 주기는 애초부터 글러먹었던 이런 몰골은 루이즈에게 소환된 이후로도 크게 바뀌지 않았고, 이런 파우스트의 흉한 모습은 학생들의 그에 대한 안 좋은 수군거림을 뒷받침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파우스트에게 호감을 품기 시작한 루이즈조차도 그의 외모에 대해서만큼은 도저히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었다. 뭐, 이는 루이즈가 그런 외모로 인한 마이너스조차도 상쇄시켜버릴 정도로 파우스트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랬었는데... 지금 파우스트의 얼굴은 그런 루이즈의 기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원래의 나이조차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몰골이었던 때의 모습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멋진 남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로 파우스트인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였다. "뭐냐, 루이즈. 내가 조금 '비대해지기는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솔직히 좀 너무한 거 아니야?" 파우스트가 빈정거리듯 중얼거린 말마따나, 확실히 '비대해졌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보면 전반적인 특징이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라거나, 하르케기니아 대륙에서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고 있는 좌청우녹의 월목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여전했다. 물론 원래의 파우스트가 지나치게 깡말랐던 탓에 '비대해졌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저 얼굴에 살이 좀 붙었을 뿐이라고 해도 이건 완전히 달랐다.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성숙해보이고,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어린 티가 엿보이는 얼굴은 비록 그가 제법 긴 머리카락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다지 여자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남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파우스트를 무척이나 보고 싶었지만 꿈에서조차 괴로운 일만 겪었기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던 루이즈에게 있어서, 그가 이렇게 파우스트가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건 무척이나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파우스트와의 재회의 기쁨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던 루이즈 조차도 머릿속 한 쪽 구석에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저 모습은?! 워, 원래 저러진 않았잖아? 그렇게나 걱정시켰으면서 이제 와서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이런 건 반칙이라구!' 가뜩이나 파우스트에게 그리움과 함께 연심을 품고 있었던 루이즈에게 있어서 다시 만난 파우스트가 그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였던 외모가 나아진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제 루이즈의 마음은 도저히 겉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루이즈는 지금껏 파우스트가 죽었다고 생각해왔던 탓에 늘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죄책감과 공허함, 만나고 싶었는데 만나지 못했다는 슬픔과 안타까움 등등의 감정을 일시에 보상받고 싶었다. 꿈에서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파우스트의 존재를 좀 더 가까이에서, 그의 숨결과 심장 고동, 체온 같은 것들을 피부를 통해 직접적으로 느끼고 싶었다. 이러한 거대한 욕망을 견디지 못한 루이즈는 파우스트에게 달려들었고, 그의 품에서 그러한 것들을 느끼고 싶었다. 그랬었는데... 상황은 루이즈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루이즈의 기습적인 다이빙 어택(...)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파우스트는, 운이 나쁘게도 바닥에 있던 돌에 허리를 부딫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허리를 다친 파우스트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일시적으로 몸이 마비되는 증상을 보였고, 결국 혼자서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파우스트는 여기에 대해서 루이즈에게 무척이나 화를 냈다. "크으으윽...! 루이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간만에 만난 상대를 꼼짝도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히는 게 내가 모르는 이 세계의 관습이기라도 한 거냐? 어엉?!"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변명은 나중에 해! 일단은 내 몸 위에서 좀 내려 오라고! 네 체중이 실려서 아파 죽겠단 말이다!" "아! 미, 미안해!" 허겁지겁 파우스트의 몸 위에서 내려온 루이즈는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말로 화가 난 듯한 파우스트의 표정을 살피고는 안절부절하다가, 세실리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어, 어떻게 하면 좋죠?" "이, 일단은 마을로 옮겨서 상태를 살피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당황한 나머지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루이즈에게 세실리는 어색하고도 애매한 웃음을 지으면서 상식적인 대답을 했다. "그... 그렇겠죠?" "네, 그렇죠." 그렇게 해서 일단 파우스트를 마을로 옮기기로 했으나, 일시적 마비 증세를 보이는 파우스트가 부축을 받는다 하더라도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결국 세실리가 파우스트를 등에 업고 마을까지 옮기고, 루이즈는 세실리보다 먼저 마을로 가서는 적덜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마을로 급히 뛰어간 루이즈는 마을에 데르플링거에 아녜스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자초지종은 나중에 듣기로 했다. 이후 세실리에게 업혀 마을로 도착한 파우스트는, 오늘 루이즈에게 배정되었으나 그 이전에는 자신이 사용했던, 티파니아 집의 침대에 눕혀졌다. 이미 잠든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루이즈, 티파니아, 아녜스, 세실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골렘이 된 이후로 파우스트의 기억과 지식(의학&약초학 포함!)을 가진 데르플링거가 그의 몸을 진찰했다. "뭐... 다행히 파트너가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아. 신경이 좀 놀랐는지 약간의 마비증상이 있긴 하지만, 일시적인 거니까 조금만 안정을 취하면 괜찮을거야. 통증도 뭐...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겠지." "휴우, 다행이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루이즈가 안도한 듯 표정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간신히 파우스트가 무사한 모습으로 살아있는 것을 만나게 되었는데, 자기 때문에 평생동안 몸이 불편한 채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면 그것만큼 어처구니없고 안쓰러운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안도하고 있는 루이즈에게 무척이나 배알이 꼴린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 다행이라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파우스트였다. 침대에 누운 파우스트는 분노로 가득 찬 표정으로 루이즈를 노려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다행이라는거야, 지금?" "그, 그치만... 다행인 건 사실이잖아..." "흥,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너 때문이잖아! 그런데 내가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다행이라는 말로 은근슬쩍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넘어가시겠다? 그게 날 이꼴로 만든 장본인이 할 소리냐고?!" "그, 그런 게 아니라... 무, 물론 내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 정도로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호오, 그 정도로 내가 쓰러질 줄 몰랐다는 건가? 그래서 넌 지금 너 정도의 체중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 내가 잘못이라는 거냐, 엉? 지금 내가 약골이라고 비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으으으..." 계속해서 화난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파우스트에게 루이즈는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사과했다. "저, 정말 미안해... 이렇게 되기를 바랐던 건 결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다쳤으니까... 사과할게." 루이즈가 순순히 사과하자 파우스트는 뭔가 못마땅한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쳇, 네가 이렇게 순순히 사과해버리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여기에서는 좀 더 치고 나왔어야지... 정말이지,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녀석이라니까...' 사실, 파우스트는 지금 딱히 루이즈에게 화가 났던 건 아니었다. 물론 파우스트가 강림제 마지막 날에 있었던 루이즈의 말 때문에 그녀에게 크나큰 서운함과 분노, 그리고 실망감을 조금 전까지 계속 느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비록 자존심 때문에 루이즈에 대한 악감정을 유지시키려고 자신이 다소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랬었는데... 조금 전에 루이즈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단순히 루이즈에 대한 자신의 다소 억지스러운 악감정을 버리고 용서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쯤되자, 파우스트는 더 이상 강림제 날의 일 때문에 루이즈에게 뭐가로 투덜거리는 건 스스로가 꺼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파우스트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루이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난처해졌던 것이다. 일단 파우스트는 이전의 일을 가지고 루이즈에게 트집을 잡으면서 화를 내는 건 포기했다. 하지만, 루이즈에게 다정하게 대한다는 선택지는 파우스트에게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간만에 마주하게 된 루이즈가 나름대로 반갑기도 했고 자신이 무모한 행동을 감행하기까지 했던 이유에 대해서까지 이해해준 그녀에게 고맙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속보이는 짓은 자존심 때문에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연히 루이즈에게 화를 내는 것 역시 마땅한 근거도 없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고, 이전에 나름대로 가깝게 지낼 때처럼 평범하게 대하는 것도 괜히 친근감을 드러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 파우스트는 어떻게 루이즈를 대해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비록 겉으로는 비아냥 거리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 뒤로부터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루이즈가 파우스트에게 안기려는 듯 뛰어들다가 파우스트가 그걸 견디지 못한 채 쓰러졌고, 그 과정에서 바닥에 놓여있던 돌에 허리 근처가 부딫히는 일이 발생했다. 부딫히는 순간에는 죽을 정도로 아팠지만... 아픈 와중에도 파우스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아파...! 진짜 아프다고! 그, 그렇긴 한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나에게 있어 찬스일지도 모르겠군. 이걸 빌미로 하면 루이즈 녀석에게 자연스럽게 화를 낼 수 있을 테니까... 그걸로 당장의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크윽, 그건 그렇다 치고... 역시 아파!' 이런 식으로, 아픈 와중에서도 파우스트는 자신의 체면을 차릴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해냈던 것이다. 즉, 루이즈로 인한 자신의 부상이 일단 잘 된 일은 아니었지만, 파우스트는 그것을 기회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다. 냉철하다면 냉철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치졸하다면 치졸하다고 할 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파우스트가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한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아무튼, 파우스트는 이런 식으로 화를 내면서 루이즈를 자극함으로써 그녀를 발끈하게 만든 뒤, 말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꽁해진 상태로 일단락을 시킴으로써 오늘 하루를 넘겨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이즈가 이렇게 순순히 사과를 해버리자 그 뒤로 뭘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또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과까지 받은 이상 더 이상 화를 내는 게 무리였던 것이다. "...쳇, 알았으면 됐어." 결국 파우스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루이즈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서 다소 멋쩍은 기색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파우스트가 루이즈의 사과를 받아들였으니 허리 부상에 관한 건은 일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파우스트는 파우스트 대로 난처한 입장이었고 루이즈는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파우스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데르플링거가 파우스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무튼, 파트너의 허리 부상이 심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야." "뭔 당연한 소릴 하고 있는거냐?" "아니, 흔히들 말하잖아. 허리는 '남자의 생명'이라고. 만약 파트너가 허리를 심하게 다쳤더라면 제대로 '남자 구실'도 하지 못하게 될 뻔 했으니까 다행이라는 거야." 데르플링거가 한 말의 의미는 다들 아시리라 믿고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제법 장난을 치는 기색이 강한 말투로 저속한 농담을 중얼거리는 데르플링거에게 당황하는 사람이 둘 있었으니... "네, 네 놈! 지금 대체 무슨 저속한 소리를 하는 건가?!" "마, 맞아요! 왜 그런 소리를!" ...아녜스와 세실리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데르플링거에게 항의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야, 데르플링거. 그건 대체 무슨 의미로 한 말이야? 그리고 저 두 사람은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거냐?" "그러게. 왜 그러는 걸까?" "...?" ...정작 '당사자'인 파우스트와 루이즈, 그리고 거기에 꼽사리로 티파니아는 데르플링거가 한 말의 의미나 왜 두 사람이 당황하고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방면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거의 지식이 없는 루이즈와 티파니아는 문자 그대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루이즈보다도 그런 계통의 이야기에 대해서 더더욱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그녀들과 같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베이스로 깔고는 있었지만, 아녜스가 내뱉은 '저속한 소리'라는 말에 착안해서 데르플링거가 한 말이 뭔가 '음란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는 사실은 추측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미궁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순진한 반응을 보이는 세 사람에게 오히려 놀란 것은 아녜스와 세실리였다. "어? 설마 저 깡통이 한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건가?" "그, 그런가 보네요. 세상물정을 모르는 귀족 아가씨랑 시골 아가씨가 저 말의 뜻을 모르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남자쪽이 이 말의 의미를 몰랐다는 건 좀 의외랄까..."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군..." 아무래도 두 사람은 루이즈와 티파니아가 이 말의 의미를 몰랐던 건 납득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파우스트까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데르플링거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뭐, 파트너는 보기보다 순진하다구. 지금껏 여자랑 엮일 일도 없었기도 했고, 그쪽 방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으니 말이지." 만약 두 사람이 파우스트가 지금껏 어떤 인생을 보냈는지를, 그러니까 '그런 쪽'에는 관심을 가질 새도 없는 삶을 살았는지를 알았다면 파우스트가 일반적인 동년배의 남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순진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상상은 '망상의 영역'에까지 넘어가고 말았다. "흐음, 그쪽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고? 그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만. 원래 남성은 여성보다 그쪽으로 욕구가 강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나이가 되도록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뭐하긴 하지만... 어쩌면 여성에게보다 남성에게 더 관심이 있다거나 하는 건..." "...그, 그건 아닌 것 같다. 그건 욕구가 굴절된 방향으로 표출된 결과이긴 하지만, 욕구 자체는 존재한다는 게 아닌가? 그건 전혀 지식이 없어보이는 지금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지." "그게 아니라면... 호, 혹시... '불능'인 건 아닐까요?" "'불능'이라... 왠지 모르게 신빙성이 있어보인다는게 무섭군. 하긴, 그거라면 이 상황이 설명이 되기는 해." "그, 그렇죠...?" 총사대 대장과 그 대원의 이야기는 점점 파우스트에게 있어 실례가 되는 영역으로까지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두 사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기에 침대에서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파우스트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뭐라고 속닥거리는지 가까이에까지 와서 들은 데르플링거나 루이즈, 티파니아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자, 잠깐! 아무래도 이야기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은데... 파트너가 이 대화의 내용을 듣고 무슨 뜻인지 알았다가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껄?" "마, 맞아요! 아무리 말이라고는 해도 파우스트를 그런식으로 말하는 건 좀 지나치잖아요? 동성애에다 불능이라니!" "불능...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성애는 좀 심한 것 같은데요..." 데르플링거는 총사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위험한 곳까지 발을 들였다는 사실에 다소 당황한 눈치였고, 적어도 동성애와 불능이라는 단어의 의미 정도는 알고 있었던 루이즈는 두 사람에게 항의했으며, 동성애의 의미만 알고 알고 있는 티파니아 역시 이야기가 너무 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 같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렇게 4명의 여성과 1기의 골렘이 파우스트에 대해서 무척이나 실례가 될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을 때, 이야기의 화제거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화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게 된 파우스트는 대체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다소 짜증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아, 정말이지. 대체 날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속닥거리고 있는거지? 역적모의라도 하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돌아온 것은 5인분의 일갈이었다. 아녜스 : 네 놈은 몰라도 된다! 세실리 : 당신은 신경쓰지 마세요! 루이즈 : 파우스트는 몰라도 돼! 티파니아 : 파우스트는 모르는게 좋을거야! 데르플링거 : 파트너는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4명과 1기가 한꺼번에 자신을 향해 몰라도 된다는 식으로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순간적으로 그 기세에 눌린 파우스트는 약간 움츠러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알았어... 제길, 대체 뭐냐고..." ...이렇게 이야기가 약간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는 했지만, 좀전까지의 화제에 파우스트가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루이즈가 제빠리 화제를 다른 쪽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이야기는 다시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다. "아, 아무튼... 알비온의 7만 대군과 상대한 뒤로 아까 전 다시 만날 때 까지...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으음, 그게 궁금하단 말이지... 뭐,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는 아무래도 좋지만 말이야." 여전히 조금 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신경이 쓰였던 파우스트였지만, 일단은 루이즈의 물음에 대한 대답부터 했다. 자신의 심장이 한 번 멈췄기 때문에 그 때 사역마의 룬이 지워졌었던 것, 다시 데르플링거의 조치로 인해 심장이 뛰게 된 뒤에 이 마을에 와서 티파니아가 가진 반지의 힘과 데르플링거의 수술을 통해 목숨은 건졌지만 2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는 것, 정신을 차린 뒤에는 몸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식사량도 늘이고 운동도 하다가 아녜스가 이 마을에 찾아왔다는 것, 등등의 이야기를 말이다. 일단 여기서는 티파니아가 하프 엘프이자 허무의 사용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전략)...그러다가 네가 이 마을에 찾아왔고, 밤중에 셰필드인지 뭔지 하는 여자의 습격을 받았던 거지. '아주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도중에 끼어들었던 거고... 그러다가 너 때문에 허리에 부상을 입고 지금 이 지경이 되어버린 거다." "그, 그렇구나..." 다시금 자신이 파우스트의 허리를 다치게 만들었던 이야기가 나오자 루이즈는 약간 미안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가, 이내 뭔가 떠올랐는지 파우스트에게 질문했다. "아, 그런데... 그렇다는 건 나와 세실리 씨가 이 마을에 왔을 때 넌 이미 여기에 있었다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 때 나오지 않았어? 미치 일부로 숨으려고 했다...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드는데?" "으음..." 이제는 파우스트가 좀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루이즈를 피하려 했던 이유가 제법 치졸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루이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동안 고민하던 파우스트는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몰라도 돼." "뭐, 뭐야? 그런 게 어딧어?" 파우스트는 항의하는 루이즈를 노려보면서 윽박질렀다. "시끄러!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좀전에 너도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던 이야기에 대해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었잖아? 그걸로 상쇄된 걸로 생각하라고!" "으윽..." 차마 자신의 입으로 파우스트에게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던 루이즈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 있는 루이즈의 표정을 본 파우스트는 좀 전에 루이즈가 그랬던 것 처럼 제빨리 화제를 전환시키려고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넌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날 소환했던 당일, 넌 분명히 내게 이렇게 말했어. '소환 게이트로 대상이 들어오면 그 대상이 죽기 전에는 다시 소환 게이트를 열 수 없어.' 라고 말이야. 그리고 아까 전에 셰필드인가 뭔가 하는 여자에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할 때, 넌 소환 게이트가 열렸기 때문에 내가 죽었던 거라고 판단했다고 했었지? 그건 너에게 더 이상 사역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야. 내 사역마의 룬이 지워졌던 것도 이를 뒷받침하지. 요컨데, 난 더 이상 너의 사역마도 아니고, 넌 더 이상 내 주인이고 뭐고도 아니라는 거야. 뭐, 애당초 난 널 내 주인으로 인정했던 적이 없었지만 말이지." 비록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중요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는 사역마와 그 주인이라는 명목으로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파우스트의 간달브의 룬이 파기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것은 그간 함께 지내면서 쌓아온 시간 정도였던 것이다. 그것 외에 두 사람의 관게를 분명하게 해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는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파우스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루이즈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 그건... 다시 재계약이라도 하면..." "분명히 넌 날 소환했을 때 이렇게도 말했지? '사역마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은 소환 게이트를 통해 들어온 대상 뿐'이라고 말이야. 네가 다시 서몬 서번트의 주문을 외운다고 해서, 그게 내 앞에 열릴거라는 보장은 없어." "그, 그렇긴 하지만..." 자신의 지적에 당황하는 루이즈에게, 파우스트는 약간은 가학적인듯한 표정을 '일부로' 지으면서 물었다. "그런 문제점들을 다 알면서도 왜 굳이 날 네 사역마로 삼으려고 하는 거지?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어?" 파우스트가 루이즈에게 구태여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마치 자신은 더 이상 루이즈와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뉘앙스를 의도적으로 풍기고 있긴 했지만... 그건 파우스트의 본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딱히 루이즈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에게 있어서 루이즈와의 관계는 생애 처음으로 타인과 맺어본 긴밀한 인간관계였다. 이것을 쉽게 끊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 파우스트의 본심이었지만, 그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루이즈로 하여금 말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루이즈가 적당한 이유를 대면, 메이지-사역마의 관계와는 별개로 거기에 마지못해 따라주는 척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그건..." 물론, 루이즈로서는 파우스트와 같이 있고 싶은 이유가 산더미처럼 있었다. 굳이 메이지-사역마의 관계가 아니라 해도, 그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품어버린 이상 그와 헤어지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언제까지나 줄곧 같이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루이즈 역시 파우스트 못지않게 자존심이 강했고, 동시에 부끄러움도 강했다. 파우스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픈 생각도 있었지만, 연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인 루이즈는 그 자신이 직접 공세적으로 나갈 생각을 하기보다 상대가 먼저 자신에게 알아서 다가오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루이즈는 결국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이, 이젠 나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그 외침과 함께, 루이즈는 지팡이를 뽑아들고는 다짜고짜 서몬 서번트 주문을 외웠던 것이다. 제발 파우스트 앞에 소환 게이트가 열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의 이름은 루이즈 프랑소와즈 르 블랑 드 라 발리에르. 다섯 개의 힘을 관장하는 펜타곤이여. 나의 운명에 따라 사역마를 소환하라!" 그리고 주문이 끝나자... "아...!" "허, 이건..." ...결과를 목격한 루이즈의 탄성과 파우스트의 쓴웃음에 뒤이어, 데르플링거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파트너는 아가씨의 사역마가 될 운명이었던 모양이야." 데르플링거의 말 대로, 파우스트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 하얀 색의 포탈과도 같은 소환 게이트가 열렸던 것이다. 이 모습에 정말로 기뻐하는 듯한 루이즈의 표정을 흘끗 본 파우스트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약간 얼굴에 홍조를 띄면서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루이즈 이 녀석... 이거, 아무래도...' 하지만 파우스트는 그렇게 잠자코 생각이나 하고 있을 순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데르플링거가 그에게 말을 걸면서 다가온 것이다. 그 얼굴은 어째서인지 몰라도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파트너, 준비는 되었어?" "뭐가 말이지?" "보다시피 파트너를 위한 아가씨의 소환 게이트가 열렸잖아?" "그, 그래서?" "이렇게 된 이상, 그냥 파트너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라고." 그 말을 마친 데르플링거는 무슨 신호라도 보내듯 손가락을 튕겼고, 그 직후 아녜스와 세실리가 침대에 누워있는 파우스트에게 다가오더니, 각각 팔 하나씩을 붙잡고는 억지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무, 무슨 짓이야! 아직 아프다고! 좀 더 안정을 취할 필요가...!" 허리에서 상당한 격통을 느끼면서 파우스트는 두 사람의 횡포에 항의하려고 했지만, 아녜스와 세실리는 그런 항의를 가볍게 묵살했다. "뭐, 금방 끝날테니 조금만 참아라."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는 말도 있으니까 말이죠." 억지로 파우스트를 일으킨 두 사람은 그의 몸을 소환 게이트 쪽으로 향하게 만들더니, 그대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크으윽!" 허리가 불편한 탓에 제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파우스트는 떠밀린 채로 소환 게이트를 통과해 반대쪽으로 나갔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지만 데르플링거가 받아줬다. 차갑고 딱딱한 갑옷 몸뚱이에 충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고꾸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대로 바닥에 쳐박히는 것과 큰 차이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거야?!" 파우스트는 짜증스럽다는 듯 소리쳤지만 데르플링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침대에서 눕히고는 또 다시 강조했다. "말했잖아?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면 피하지 말라고." "운명은 무슨... 난 그딴 거 안 믿는다고 분명히 네놈에게 말했을텐데!" 그렇게 파우스트가 발끈한 목소리로 항의하려고 했지만, 타인의 의도대로 일사천리로 흘러가는 이 상황에서 그는 너무나도 무력한 존재였다. "자, 이렇게 되었으니까 잘 해봐요!" "앗!" 지나치게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한 채 서 있었던 루이즈의 등을 세실리가 파우스트가 있는 쪽으로 밀어버렸고, 쓰러질 뻔 했던 루이즈는 간신히 침대 시트를 붙잡고 버틸 수 있었다... 비록 파우스트와 지나칠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져버린 자세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아...!" "크읏...!" 루이즈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고, 파우스트 역시 난감한 듯 약간의 홍조를 띈 채 고개를 루이즈의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렇게 잠깐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루이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다 시선 역시 애매한 방향이었지만 말이다. "뭐, 뭐랄까... 왠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 것 같기는 하지만... 뭐, 어쨌든! 내, 내가 연 소환 게이트가 널 선택해 버렸기 때문에 달리 다른 상대를 찾을 수도 없는데다... 메이지로서 난 사역마를 가지지 않으면 아, 안된다고...! 그, 그러니까... 또 다시 너와 계, 계약을... 해야만 할 것 같거든...? 따, 딱히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니까... 이, 이상하게 오해하지는 마..." 루이즈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는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작정 연 소환 게이트가 파우스트를 선택해줬다는 것, 주변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등을 떠밀어 줌으로써 다시 파우스트와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해 다시금 파우스트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는 상황 자체는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파우스트가 순순히 응해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불안했고, 뭣보다 계약의 과정이 키스라는 것 역시 많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냥 단순히 계약의 의식일 뿐이라면 진심이 담긴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니 자기 자신에게 변명할 거리라도 있었지만, 지금 계약을 할 상대인 파우스트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더더욱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루이즈는 컨트랙트 서번트 주문을 외우기 전에, 파우스트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이왕 해야만 하는 거라면 파우스트의 생각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괜찮겠어? 또 나랑... 계약을 해도?" 루이즈의 물음에 파우스트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비아냥거렸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주제에 이제와서 내 의사를 묻는 건 또 뭐지? 어차피 그만 둘 생각도 없으면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젠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변명하듯이 말하지 마. 솔직히 기분 나쁘다고." "으읏..." 파우스트의 비난에 루이즈는 약간 양심이 찔렸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이렇게까지 상황이 흘러가게 된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는 표정을 짓는 루이즈를 보면서 파우스트는 살짝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뭐...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거부권이 없는 모양이군." "...에?" "분명히 내가 소환되었던 당일, 넌 이렇게 말했었지. 내가 소환 게이트를 통과한 이상, 날 사역마로 삼을 수 밖에 없는데 만약 사역마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도망쳐 버린다면... 무슨 수를 쓰든지 날 잡아서 구속하는 한이 있더라도 계약을 맺을 거라고 말이야." "그, 그야 그랬지..." "지금의 내 대답 역시 그 때와 비슷해. 도망자 신세는 되고 싶지도 않고, 애당초 부상을 당한 몸이라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해. 게다가, 기껏 공적을 세우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그걸 박차버리기는 아까우니까... 그것 뿐이야. 별 다른 의미는 없어. 오해하지 마라." 파우스트는 그럴듯한 구실을 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루이즈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사실, 그 역시 루이즈와의 관계를 그냥 깨버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내세울 만한 구실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난감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루이즈가 연 소환 게이트가 자신을 목표로 열렸고, 주변의 사람들이 등을 밀어주는듯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우스트 역시 루이즈와 마찬가지로 '이건 어디까지나 주위 사람들이 멋대로 이렇게까지 일을 밀어붙였을 뿐, 나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라고 핑계를 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때 마침, 파우스트는 부상자였기 때문에 이런 핑계를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도 했다. 이렇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으나... 파우스트는 루이즈와 차이점이 있었다. 일단 한 가지는, 파우스트는 루이즈와는 달리 상대에게 애틋한 연심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정 정도라면 모를까. "아, 알았어. 그럼... 할게." 어찌되었든 파우스트가 동의한다는 의사를 보인 이상, 루이즈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지팡이를 꺼내어 들고는 컨트랙트 서번트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이름은 루이즈 프랑소와즈 르 블랑 드 라 발리에르. 다섯 개의 힘을 관장하는 펜타곤이여. 이 자에게 축복을 내려 나의 사역마가 되게 하라." 컨트랙트 서번트의 주문을 외운 뒤, 루이즈는 지팡이 끝을 파우스트의 이마에 살짝 댄 다음, 눈을 감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직접 파우스트에게 키스를 하는 건 역시 조금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 가만히 있어도 파우스트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루이즈는 눈을 뜨고는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면서 파우스트에게 항의했다. "왜,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네, 네가 움직이라고! 레이디를 부끄럽게 만들 셈이야?" 얼굴을 붉히고는 자신을 얄밉다는 듯 살짝 흘겨보는 루이즈에게 파우스트는 덤덤하게 되물었다. "내가 자력으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만든게 누구였더라?" 이건 계약을 위한 키스를 할 거라면 루이즈 쪽에서 움직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으읏...!" 그 사실을 깨달은 루이즈는 잠깐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으면서 파우스트에게 입술을 겹치려고 했으나... "잠깐!" 갑자기 파우스트가 제지했다. "왜,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루이즈는 또 다시 파우스트에게 항의하려고 했으나, 파우스트는 루이즈가 아닌 다른 주변의 인물들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어? 얼른 썩 나가지 못할까!" 그도 그럴것이... 지금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계약 장면을... 즉, 키스하는 모습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을 즐기는 듯한 아녜스의 모습이나, 흥미진진한 것을 보고 있다는 듯한 세실리나, 순진하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티파니아나, 왠지 모르게 훈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은 데르플링거의 모습 등등은, 도저히 파우스트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쳇, 눈치없는 녀석 같으니." "아, 아깝네..." "미, 미안해... 역시 실례인 거겠지?" "뭐, 파트너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3명과 1기의 골렘은 저마다 한 마디씩 중얼거리면서 방 밖으로 나갔다. 문까지 닫힌 것을 확인한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아,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로군. 야, 루이즈." "으응?" "하려면 빨리 해버려. 저 밖의 녀석들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니까 말이야." "아, 알았어..."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루이즈는 얼굴에 홍조를 띄면서 파우스트를 애틋하고도 촉촉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눈을 감으면서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그 때, 잠깐이었지만 분명하게 드러났던 루이즈의 감정을 확인한 파우스트는 아까 전 무심코 떠올랐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뭐랄까... 이렇게 생각하는게 내 자의식 과잉인지도 모르겠지만... 루이즈 녀석, 아무래도 나에게 반한 거... 맞겠지? 아무리 봐도 저 표정은... 그 때, 그러니까... 배신하기 전의 와르드 자식에게 지어줬던 표정이랑 거의 같다고... 아직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좀 이를지도 모르고, 단순한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이렇듯, 파우스트는 루이즈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사실상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것이 얼핏 보면 비슷한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의 차이점 중 하나였다. 루이즈는 파우스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에 반해서, 파우스트는 루이즈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파우스트가 루이즈의 마음을 다 알아차린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만약 루이즈 녀석이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가정할 때... 그렇게 된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역시, 내 외모가 준수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려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생각해 보면, 날 기피 대상으로 여기던 마을의 소녀들이 갑자기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는 달라붙을 정도로 친근하게 대하게 된 것 역시 내 외모가 바뀐 뒤의 일이었어. 그렇다면, 지금껏 나를 가깝게 지내는 친구 정도로 대하던 루이즈 녀석이 갑자기 날 의식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저런 표정을 짓게 된 것 역시...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해야겠지?' 외모가 바뀐 뒤 마을의 소녀들이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던 것을 본 이후로, 파우스트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묘하게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루이즈는 이런 파우스트의 생각 때문에 애꿎은 피해자가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루이즈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기 직전에, 파우스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은... 없어.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게 된다면 또 모를까... 그런 날이 찾아올런지... 그것 조차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 동안 나 때문에 그렇게나 마음 고생을 하게 만들었던 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차피 계약을 하기로 한 이상 키스를 할 수 밖에 없다면, 잠깐 동안만이라도 변덕을 부려서 제대로 하는 편이 나으...려나? 으음, 어차피 단순히 입술을 겹치는 것 이외에 달리 뭘 더 해야 제대로 키스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 녀석이 하는 대로 눈이라도 같이 감는게 나을지도...' 짧은 시간동안 그렇게 생각한 파우스트는 루이즈의 입술이 닿기 직전, 그 자신 역시 눈을 감았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인간의 체온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것이 자신의 입술에 닿았다고 느낀 직후, 파우스트는 그런 감촉을 느낄 새도 없게 되었다. 처음 루이즈와 계약을 맺었을 때 처럼, 왼쪽 손등에 불에 달군 인두를 가져다 대는듯한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다. 파우스트의 몸이 고통으로 인해 움찔거리는 것을 느낀 루이즈는 파우스트의 입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아주 잠깐 동안의 키스가 많이 아쉬웠는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한, 너무나도 사랑에 빠진 듯한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파우스트는 자신의 왼쪽 손등에 어떤 룬이 세겨지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거기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즈의 그런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잠시 후, 룬이 새겨지는 것이 끝난 뒤에 룬을 확인한 파우스트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또 간달브의 룬이로군. 뭐, 왼손에 새겨질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그, 그렇네..." 그렇게 딴청을 피우기라도 하듯 제각각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역시 어색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둔 상대와 다시 키스를 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우면서도 약간은 들뜬 기분이 든 루이즈나, 일단 루이즈에 대해서 연심은 없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역시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던 파우스트나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방 안에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방 밖에서 이 상황을 듣고 있었던 데르플링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왼손이라... 일단은 안심이로군. 오른손과 이마는 이미 나온 모양이니까 남은 것은 왼손과 가슴이었는데, 혹시 가슴이었다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말이야.' 이번 주 무한도전은 식객특집 in New York(...가칭)입니다. 지난 주 예고된 대로 무한도전 멤버들이 달력촬영을 겸해서 뉴욕으로 가서는 한식을 뉴욕에 알리자는 것이 이번 특집의 기획 의도입니다. 쌀과 김치를 이용해서 각 팀별로 요리를 제작, 뉴욕에서 뉴욕 시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승부를 짓는 것이죠. 물론 팀은 지난 방송과 같습니다.
두 팀은 각각 해외의 유명 호텔이나 식당에서 음식을 만든 셰프들을 스승으로 삼아 각자 어떤 요리를 만들 것인지를 의논했습니다. 재석 팀은 비빔밥과 김치전, 조청 떡꼬치와 겉절이를 하기로 했고, 명수 팀은 떡갈비와 김치 주먹밥, 궁중 떡꼬치를 하기로 했죠. 스케줄 때문에 노찌롱과 항돈이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의 멤버들이 먼저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두 사람은 하루 뒤에 도착하기로 되었죠. 일단 뉴욕에 도착한 멤버들은 월 스트리트나 타임 스퀘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등 뉴욕의 명소를 관광하는 기분으로 돌다가 배정된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는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 부부가 제공해줬다고 하더군요. 친절하게 멤버들이 사용할 사물함까지 이름을 붙여 준비해주는 것이 제법 훈훈한 분위기였습니다. 다음 날, 두 팀은 제각각 뉴욕을 돌면서 뉴욕 시민들이 한식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입맛은 어떤지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만, 아무래도 멤버들의 영어 실력이 실력이다 보니 의사사통에 무리를 겪었죠. 그 와중에 유반장과 쩌리짱은 뉴욕의 인터넷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식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개그가 의외로 미국인들에게 먹히는 것 같아 놀랍기도 했죠. 그러다가 뒤에 노찌롱과 항돈이가 합류한 뒤에는 뉴욕의 유명 한식 식당에 방문해서 뉴욕인들의 입맛에 맞는 한식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제각각 자신들이 제작할 음식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주문했죠. 물론 한국 음식 그대로가 미국인들에게 먹힐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만, 확실히 로컬라이즈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더군요. 기존에 한국인들이 즐기는 것 보다 덜 자극적이고 달착지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각각의 멤버들이 깨달은 것이죠. 이렇게 시장조사를 한 뒤에는 숙소로 돌아와서 각 멤버들끼리 음식 연습에 들어갑니다. 물론 한국에서 같이 팀을 짰던 셰프들과 함께 말이죠. 명수 팀은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내면서 순조롭게 연습이 진행되었습니다. 담뱃재맛 아귀 리조또(...)와 바닷물 신선로(...)를 만들었던 전과가 있던 길은 철저하게 셰프의 지시를 따르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에 셰프 역시 칭찬일색을 하며 길의 기분을 북돋아 줌으로써 긍정적인 시너지 작용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원래 고집이 세고 윽박지르기로 유명한 하찮은 역시 이번 만큼은 한 수 접고 들어가면서 고분고분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노찌롱 역시 무난하게 작업에 임했습니다. 결과물 역시 제법 괜찮았죠. 그에 반해서... 재석 팀의 분위기는 제법 날카로웠습니다. 김치전을 담당했던 쩌리짱 한 사람 때문에 말이죠. 다짜고짜 싱크대에서 김치를 씻다가 배수구를 막히게 만들고는 책임을 회피하면서 셰프에게 막힌 걸 뚫으라고 하기도 했고, 김치를 너무 씻었다라거나 반죽이 엉망이다는 셰프의 말도 무시하고 마음대로 요리를 하다가 결과도 엉망이 되는 등 마찰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결국 셰프는 한숨을 쉬었고 분위기도 엄청 다운되었죠. 쩌리짱 나름대로 그 동안 음식 관련 방송에 다년간 출연하면서 음식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좀 뻗대었던 것 같긴 합니다만... 음식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에 나온 것 가지고 진짜 전문가인 셰프에게 대들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망쳐버리는 쩌리짱의 모습은 눈살을 찌뿌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멤버들도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죠. 이런 분위기는 다음 날까지 지속됩니다. 쩌리짱은 이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혼자서 김치전을 연습했으나 결과는 여전히 엉망. 다른 멤버들도 그런 쩌리짱을 격려해주기도 하고 약간은 비아냥 거리면서 충고를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쩌리짱은 삐진 상태였습니다. 뭐, 이런 상태로 오늘 방송은 끝났습니다. 본격적인 상황은 다음 주 부터 일어날 모양이긴 한데... 아무래도 전반적으로 쩌리짱의 행동 때문에 방송을 보기가 좀 불편했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같이 방송을 봤던 제 여동생도 "정준하 얼굴 보고 싶지도 않다."라고 했고, 오늘 저녁에 집에 찾아온 사촌누나 역시 "저건 해도 너무했다."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저 역시 "정준하 오늘 인터넷에서 죽어라 까이겠군."이라고 중얼거렸었는데... 예상대로더군요. ![]() ![]() 최근에 쩌리짱으로 인기를 구가하나 싶었는데... 이번 방송에서 그걸 다 말아먹는 느낌입니다. TEO PD가 이 상황을 편집하지도 않고 너무 방관하지 않았나 하는 주장도 있었던 것 같긴 한데, 편집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요한 대목에서 정준하 본인이 저렇게 행동한 이상 이쯤되면 편집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정준하씨가 다음 주 분량에서 이를 만회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PS : 아, 그리고보니 이번 주부터 자막 디자인이 좀 바뀌었더군요. 그게 제법 눈에 띄었는데 정준하씨 때문에 기억이 안났...(...) 전교생이 2만명인 고대에서 이번에는 무려 6만명의 수시 신청자를 받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라 제법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이죠. 학생들 사이에서는 수시 신청료를 받아 챙기려는 학교 운영위원회 측의 음모라고 하긴 합니다만...
* 제 75화 : 재회. 티파니아는 파우스트의 당부 때문에 그가 이 마을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루이즈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이즈로부터 그녀가 어떤 이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 도저히 그냥 모른 척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 루이즈가 티파니아에게 했던 말은 그녀의 마음만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 그 말을 들었더라면 파우스트라도 그냥 외면하기 어려운 정도의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당시에 파우스트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탓에 루이즈의 말이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루이즈에 대해서 냉담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루이즈의 처지를 동정하게 된 티파니아는 그녀에게 파우스트가 이 마을에 있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이 마을에 지내는 동안은 잘 대해주기로 결정했고, 동시에 가급적이면 그녀가 더 오래 머물도록 만들 생각을 했다. 일단은 파우스트와 그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으므로 그 약속을 스스로 깰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즈가 이 마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아마도 그녀의 존재가 신경쓰이고 동요하고 있을 파우스트가 결국 스스로 나오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티파니아는 루이즈와 세실리에게 각각 파우스트가 쓰던 방과 거실의 자리를 제공했다. 제법 피곤했던 루이즈는 바로 당일 아침까지 파우스트가 사용했던, 만약 알았다면 깜짝 놀란 나머지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하고도 남을 사연이 있는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세실리는 자신의 무기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곧은 양날 검신에 부분적 외날이라는 펄스 에지(False Edge)의 형태를 한 사브르(Sabre)의 칼날을 기름을 묻힌 헝겊으로 닦은 뒤에는 부싯돌 점화식 권총을 분해해서 정비했다. 가는 막대기의 끝에 헝겊을 씌워 총열 내부를 닦은 다음 기름칠을 하고, 약실 내부에 남아있는 여분의 화약을 솔로 털어내고, 방아틀 뭉치를 떼어낸 뒤 마모가 심한 부싯돌을 교환한 뒤 전체적으로 기름칠을 하고 나서는 다시 조립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무기 정비를 마친 세실리는 역시 거실의 침대에 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런 두 사람이 일어난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두 사람 다 일어나세요. 식사시간이랍니다." 저녁 준비를 마친 티파니아가 두 사람을 깨웠던 것이다. 원래 자신의 식사는 간단하게 먹던 티파니아였지만, 이번에는 루이즈를 위해서 좀 더 신경을 써 봤다. 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밀가루를 사용해서 부드럽게 구운 빵에다 우유와 전분, 야채와 버섯, 고기 조각들을 넣고 끓인 스프, 데르플링거가 숨느라 방치하고 간 멧돼지를 사용한 고기 요리, 신선한 야채에 올리브유를 살짝 뿌리고 치즈 조각을 곁들인 샐러드, 그리고 숲에서 딴 여러 종류의 과일 등, 식사를 준비하는 데에만 2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로 노력을 투자한 음식들을 테이블에 차렸던 것이다. 이런식의 본격적인 대접은 고급스러운 음식에 익숙한 귀족 출신의 루이즈라고 해도 이 정도의 음식을 이런 숲속의 외진 곳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마련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조금 부담감을 느낄 정도였다. "저기, 티파니아... 라고 했었죠? 뭐랄까... 너무 신경써주시는 것 아닌가요?" "그, 그러게. 왠지 모르게 너무 대접이 후한 것 같아서 좀 부담되는데..." 귀족인 루이즈조차도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였으니 일단은 평민인 세실리도 약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티파니아는 약간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한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아니, 괜찮아요. 모처럼의 손님들을 홀대할 수는 없으니까요. 부담감 가지지 말고 들어요." "아, 네..." "뭐, 정 그렇게 말한다면야..." 티파니아가 너무 신경을 써준 탓에 조금 부담스럽게까지 여겨지긴 했으나, 일단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가면 또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 인간이다.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루이즈와 세실리는 이내 음식을 먹는 페이스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티파니아는 미소를 짓는 한편, 속으로는 파우스트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소 걱정하기 시작했다. '후우... 일단 약속을 해버렸으니 파우스트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에 걸려. 이 루이즈라는 사람이 찾는 사람이 바로 이 마을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면서 보내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 말이야. 나로서는 가능한 한 대접이라도 잘 해주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파우스트가 생각을 좀 바꿔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세 사람이 약간씩은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진수성찬을 들고 있을 무렵... 숨어있는 처지가 된 파우스트와 아녜스 역시 식사를 할 때가 되었다. "슬슬 식사를 할 때인 것 같은데... 당신, 챙겨왔다는 그 보존 식량이나 꺼내 보라고." "쳇, 알았다." 일단은 자신이 챙겨왔던 가방 속에서 보존 식량을 꺼내긴 했지만, 그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역시 보존 식량이라는 것은 즐겁게 먹을 만한 물건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보존 식량이란 모름지기 휴대하기 편해야 하고 식사 준비가 간단해야 하며 장기간동안 부패하지 않아야 하는 조건을 갖춰야 하기 마련인데, 식용 가능한 방부제나 진공 포장, 하다못해 통조림과 같은 부패 방지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여건에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맛'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기 마련이다. 아녜스가 준비해온 보존 식량은 건빵과 각종 곡물 가루, 탈지 분유와 염장 고기, 소금, 그리고 물병에 담아뒀던 물로, 대표적인 보존 식량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긴 했지만 이 중에서 건빵과 염장 고기는 보존 식량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음식으로서는 치명적이라고 해도 좋을 조치가 취해진 물건들이었다. 우선 건빵의 경우, 밀가루와 소금만을 사용해서 반죽한 뒤 구멍을 뚫고 오븐에서 구운 다음 꺼내어 말리고는 또 다시 굽는 공정을 거침으로써 습기를 최대한 줄여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물건이다. 습기가 거의 제거되기 때문에 오래 보존할 수 있지만, 그 대신 밀가루로 만들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도를 가지게 된다. 맨손으로 뜯더나 이빨로 깨서 먹는 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단하기 때문에 망치나 돌로 깨거나 물에 타서 녹여야만 간신히 먹을 수 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염장 고기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했다. 부패를 막기 위해 소금에 절이는 염장법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그냥 고기를 소금에 절였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고기를 소금에 매장시켜 버렸다는 정도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상하지 않도록 지방을 떼어낸 고기를 소금속에 집어넣으면 삼투압의 차이로 인해 고기 내부의 수분이 빠져나오게 되므로 최종적으로는 말라 비틀어진 모습의 고기가 되어버리는데, 모양도 모양이지만 색까지도 시퍼렇게 변색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이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고기라고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물건이었다. 이를 먹기 위해서는 물에 담궈 소금기를 빼내는 작업을 거쳐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맛이라도 있느냐고 하면...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는다고 생각해야 할 수준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비록 이런 걸 준비한 것이 아녜스라고 해도 도저히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달리 음식물을 구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면 참고 먹었겠지만, 지금 상황은 이야기가 많이 달랐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숨어야 한다고 우기고 있는 파우스트 때문에 이런 열악한 보존 식량을 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아녜스로는 상당히 불만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제길, 내가 어째서 네 녀석 때문에 굳이 이런 걸 일부러 먹어야 한단 말인가?" "거 참 되게 잔소리 많네. 상황에 따라서 이런 걸 먹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그 사이에 잊어버리기라도 한 거냐고? 며칠 노닥거렸다고 군기가 빠진 모양이로군." "뭐가 어째? 이게 다 네 녀석이 초례한 상황이지 않은가?" "시끄러. 난 내 사정에 대해서 다 이야기했고 당신도 이미 납득하지 않았나? 더 이상 무슨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거지?" "누가 그걸 납득했다는 거지? 설령 납득했다고 해도,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다!" "불평은 이제 그만하고 당신도 식사 준비를 도와...라고 말하고 싶지만, 벌써 준비는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로군. 하지만, 자꾸 그렇게 불평하면 나 혼자 전부 다 먹어버린다?" "쳇, 정말로 제멋대로군!" 아녜스는 짜증난다는 투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파우스트는 그런 아녜스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하면서 보존 식량을 조금이라도 더 먹기 쉽게 만드는 공정을 거의 다 마쳐가고 있었다. 뭐, 이 공정이란게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은 먼저 그릇에다 물을 붓고는 염장 고기를 넣고 씻으면서 고기의 소금기를 최대한으로 줄여놓은 뒤, 고기를 작게 조각낸다. 그 다음에는 아녜스가 챙겨온 휴대용 솥에다 물과 탈지 분유, 곡물 가루와 건빵, 그리고 작게 조각낸 고기를 집어넣고 불(역시 아녜스가 가져온 불 피우는 도구를 사용했다.) 위에 올려놓고는 한꺼번에 끓인다. 염장 고기의 소금기가 남아있으므로 별도의 소금을 뿌릴 필요는 없으며, 건빵의 강도가 맨손으로는 깨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높으므로 섯불리 깨는 것 보다는 그냥 물로 끓이면서 불리는 편이 더 나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수분을 빨아들여 불은 밀가루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걸쭉한 죽이라는,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완성된다. 지금은 다 끓기를 기다리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파우스트가 '준비는 다 끝난다.'라고 한 것이다. 조리가 완료된 뒤, 두 사람은 먹을 만큼 그릇에 덜은 다음 스푼으로 떠서 목구멍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일단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기는 했지만 도저히 빈말로도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물건이기는 했다. 전체적으로 텁텁한 맛에 약간의 소금기가 느껴지는 정도였고, 간간히 들어있는 고기는 연골을 씹는 느낌이었으며, 거기에 곡물가루에 모래가 좀 섞여있었던 모양인지 가끔씩 모래가 씹히기도 했다. 그나마 건빵 속에 바구미가 없었기 때문에 바구미 찜을 추가적으로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정도였다. 비록 물을 먹어 축 늘어진 건빵의 텁텁함은 죽 이상이었지만 말이다. 이건 말 그대로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는다는 말 외에는 할 수도 없었다. "후우, 이런 걸 먹는거야 나름 익숙해졌다고는 생각했다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는 느낌이로군. 다른 대원들과 임무를 나왔을 때라면야 그들이나 나나 같은 걸 먹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저쪽에서는 이것보다 더 나은 식사를 하고 있을거라 생각하니 왠지 속이 더 괴롭게 느껴진단 말이지. 네놈의 고집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야." 적당히 배를 채운 아녜스는 파우스트를 향해 그를 비난하는 시선을 보냈고, 파우스트도 거기에 대해서 짜증스럽다는 반응으로 답했다. "아까부터 잔소리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정말이지 적당히 좀 하라고! 배 좀 채웠으면 됐지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 그렇게 파우스트가 짜증을 낸 것은 아녜스가 그저 식사'만'을 가지고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유인 '상대적으로 빈곤한 식사' 역시 그녀가 짜증을 부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는 할 것이다. 원래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 빈곤감보다 상대적인 빈곤감이 더 비참함을 주는 법이며, 그런 의미에서 아녜스가 파우스트 때문에 졸지에 갖잖은 보존 식량이나 먹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기분이 상할수도 있는 일이긴 할 것이다. 사실, 음식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파우스트 조차도 갑자기 이런 걸 먹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음식 문제가 아니었다. 아녜스는 그 음식 문제를 트집잡아서 루이즈를 피하려고 하는 파우스트의 태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전 아녜스가 '납득하지 않았나?'라는 자신의 말에 '그렇지 않다.'고 정면으로 반박하는 모습에서 파우스트는 그 점을 인식했고, 파우스트는 거기에 대해서 화가 났던 것이다. '대체 이건 뭐야... 나 혼자서 괜히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내 자존심 때문에 루이즈 녀석에게 상처를 주는 걸 하고 있다는 걸 비난이라도 하겠다는 거냐고? 흥, 그래서? 애당초 먼저 잘못한 건 루이즈 녀석이야! 게다가 그 녀석이 제대로 반성을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잖아? 그런 상황에서 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갈 순 없어! 당연히 녀석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나에게 오던가 해야지! 난 그저 그 때를 기다리면 되는거야! 아니, 그걸로는 모자라! 가능하다면 최대한 그 녀석이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자각할 수 있도록 상황을 구축해야 한다고!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는 나 자신이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루이즈 그 녀석도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최선의 상태를 만들어야, 그 녀석도 내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꿇을 테니까... 그래, 그 때도 이제 머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그런데... 왜 아녜스는 마치 내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지? 내 사정에 대해서도 적당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까지 했는데도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은 파우스트는 위에서 언급했던 '짜증스러운 반응'과 함께 아녜스에게 비난의 시선을 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파우스트는 원래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잘 드러내보이는 성격도 아니었고, 특히 이런 민감한 부분에 있어서는 더더욱 남에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녜스는 이미 파우스트의 심리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존재인 데르플링거로부터 자신의 생각을 검증받은 상태였다. 파우스트가 딴청을 부린다고 해 봐야 별로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이 녀석은 정말로 지기를 싫어하고, 자존심 때문에 마지막까지 허세나 부리려고 하는 타입의 인간이로군. 뭐, 나도 조금은 그런 식이긴 하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어쨌든, 그 골렘 말대로 내가 이 녀석에게 뭐라고 해 봐야 바뀌지는 않을거야. 오히려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 내 신경질이나 돋구고 말겠지.' 그렇지만, 일부로 파우스트를 자극해봐야 시끄럽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아녜스는 굳이 강하게 따지려고 들지는 않았다. 그냥 데르플링거의 말 대로 그가 알아서 마음을 바꾸는 편이 더 나을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뭐, 알았다. 내가 잔소리를 해 봐야 특별히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지. 하지만, 나에게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네가 알아서 해'라." "...뭐야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 일단 이것으로 대화는 일단락되었고 집 내부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 다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듯한 표정의 아녜스와는 달리 파우스트의 표정은 상당히 찝찝한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녜스가 마지막으로 한 말에서 '난 네 속을 다 알고있다.'라는 듯한 여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 밤 무렵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은둔 생활의 또 다른 현실적 문제점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먼저 깨달은 것은 아녜스였다. 목에 갈증을 느끼던 그녀는 그녀의 가방을 뒤적거리면서 수통을 찾다가, 그 수통이 다 비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는 파우스트가 그 수통에 든 물을 저녁 준비를 하느라 전부 다 사용해버렸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이 마른데 수통이 비어버렸군." 아녜스의 그 말에 파우스트는 속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적인 상수도 시설이라는 개념이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이건 하르케기니아 대륙 뿐만이 아니라 생츄어리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 물을 구할 순 없는 일이고, 따라서 물이 필요하다면 마을 내의 우물이나 하천과 같은 수원에 직접 찾아가 물을 길어와야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일단 들키지 않도록 숨는 것을 우선시하다 보니 사전에 필요한 만큼의 물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결국 물이 필요하다면 집 밖으로 나가서 물을 길어와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들킬 우려가 있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이다. '이런,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일단 물이 없이는 살 수 없으니 구해올 필요는 있겠지만, 이러다 잘못해서 들키기라도 하면... 아니, 아무래도 루이즈 녀석을 동정하고 동시에 내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는듯한 저 여자가 멋대로 행동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제법 곤란한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파우스트는 속으로 약간 당황했지만, 일단 겉으로는 시큰둥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일단은 명색이 군인인 주제에 갈증이 좀 난다고 해서 그걸 못 참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럼 뭐냐?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해도 앞으로는 물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상황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건가?" "누가 뭐라고 했나? 지금은 좀 참으라고. 저 녀석들이 다 잠든 사이에 길어오면 될 일이니까." 파우스트는 여전히 태연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밖에 나갔다가 자신이 이 곳에 있다는 것을 들키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동시에, 뭔가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듯한 아녜스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아녜스는 약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건 곤란하다. 난 지금 제법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거든. 즉, 수분 보급이 절실한 상황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물을 구하러 나가봐야겠다." 약간은 어설픈 연극 같은 느낌이 드는 말투와 동작이었지만, 이는 아녜스가 정말로 연기에 서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녀가 파우스트에게 장난을 치려고 한다는 기색을 일부로 티나게 보임으로써, 그를 도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다분했다. 물론, 눈치가 빠른 인간에 속하는 파우스트는 그런 아녜스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의도야 어찌되었든 파우스트의 입장에서는 아녜스가 정말로 바깥으로 통하는 문 앞까지 가서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려는 동작을 취하자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 잠깐! 누가 나가도 된다고 했지?" "그야 내 마음이지. 네 녀석에게 내 행동을 구속할 권한이나 명분이 어디에 있나?" "물론 그딴 건 없지만, 지금은 좀 협조해 주면 어디가 덧나냐고?" "네 녀석 때문에 난 굳이 안 먹었어도 될 보존 식량을 먹기까지 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협조한 게 아닌가?" "나이 찬 아줌마가 아직까지 음식 투정을 부리는 건 솔직히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뭐가 어째? 아줌마라고? 그게 정말로 '협력'해주기를 원하는 상대에게 할 말이라고 생각하나?" 농담처럼 시작했지만 지금은 정말로 기분이 나빠진 아녜스는 당장에라도 문을 열어버릴 것 처럼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버렸고, 결국 파우스트도 태연한 척 하던 가면을 벗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잠깐! 지금 정말로 나갈 생각인가?" "말하지 않았나? 난 지금 목이 마르다고 말이야. 어차피 며칠동안 이 집안에 있을 생각이라면 충분한 양의 물을 길어놓을 필요가 있을텐데?" "그건 그렇지만, 아직은 밤이 늦지도 않았어. 그렇게 많은 양의 물을 본격적으로 길어오다가는 들킬 위험이 크기 때문에 무리라고!" "들키든 말든 나랑은 딱히 아무런 상관이 없다만?" 금방이라도 나가버릴 것 같은 아녜스의 태도에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이 굽히기로 했다. "크읏... 조, 좀전의 실언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너무 신경쓰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그다지 내키지 않는듯한, 억지로 말하는 듯한 목소리는 사과하는 태도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진정성이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 파우스트'가 스스로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어지간히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의 파우스트의 모습과 평소 모습과의 갭에서 애처로움까지 느낄 수 있었던 아녜스는 화를 내던것도 잊어버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물을 길어오는 건 나중으로 하자고." "흥, 그렇게 나오셔야지." 아녜스의 말에 파우스트는 순간적으로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 표정은 곧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투로 바뀌었다. 뭐, 그렇긴 하지만 파우스트도 나름대로 아녜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양인지 약간은 불안해하는 듯한 분위기로 흘끗흘끗 아녜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흐음... 언제나 건방만 떠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었군. 이거 뭐랄까... 여기서 조금 더 괴롭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약점을 잡힌 상태에서는 의외로 약한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는 파우스트를 본 아녜스는 약간 위험한 영역에 눈을 떴다. 다분히 가학적인 의미의 즐거움에 대해서 인식한 것이다. 어쨌거나 체중이 조금 불어난 파우스트는 아녜스가 봐도 제법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의 아녜스의 충동적인 감각을 더욱 자극했다. 고약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기분에 빠진 아녜스는 파우스트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 그래... 내일 사용할 물을 길어오는 건 나중으로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목이 마른 건 어쩔 수 없군." "...뭐?"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아녜스를 보고 있으려니 안도하고 있었던 파우스트는 또 다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녜스를 말리려고 했다. "자, 잠깐... 그래서, 지금 나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물론이다. 뭐,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금방 목만 축이고 올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아녜스는 문고리에 손을 뻗으려고 했고, 결국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파우스트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은 밤이 늦지도 않았다고. 들킬 확률이 높으니까 지금 반대하는 건데 말이지..." 파우스트는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아녜스를 만류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적잖이 아녜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오, 이것 봐라? 안절부절하지 못하면서 화도 내지 못하고 있다니, 평소때의 녀석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반응인데... 좀 더 놀려볼까?' 파우스트의 다소 신선한 반응에 재미를 붙인 아녜스는 좀 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듣자듣자 하니까... 마치 내가 나가면 무조건 들키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 이래뵈도 난 여왕 폐하의 직속 친위대인 총사대의 대장이다. 잠깐 물을 마시러 살짝 나가는 것 조차도 쉽게 들켜버릴 거라고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네 녀석은 날 어지간히 무시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 어쩌면 네 녀석, 내가 물을 마시러 간다는 걸 핑계삼아 라 발리에르 양에게 네 녀석이 여기에 숨어있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할 것 같다는 건가? 거 참 너무하군. 난 투덜거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네놈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지금껏 참고 있었는데, 날 믿기는 커녕 도리어 의심을 하고 있었다니..." "그, 그건..." 이제는 완전히 아녜스의 턴... 아니, 페이스였다. 상황이 이쯤되자 파우스트도 언젠가의 데자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제길... 아녜스에게 완전히 놀아나고 있잖아? 이래가지고는 마치 그 때랑 똑같아! 매혹의 묘약을 먹고 맛이 가버렸던 뒤에 날 괴롭히던 루이즈랑 비슷한 상태라고! 무, 물론 그 때가 더 심각하긴 했지만... 정도의 문제가 아니야. 또 이런 식으로... 상대방에게 꼼짝도 못한 채로 끌려다니면서 굴욕을 당하는 건 싫다고!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아니, 어쨌든... 이대로 얌전히 앉아서 당할 성 싶으냐!'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당해야 하는 상황을 참지 못했던 파우스트는 매우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다가, 결국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크읏...! 저, 정 그렇다면야 하는 수 없지. 솔직히 말해서, 난 들키는 것도 사양하고 싶고... 당신은 더더욱 못 믿어! 하지만, 너무 박정하게 대한다면 딴짓을 하려고 할 것이 뻔하니까... 물 한잔 정도는 특별히 내가 떠오기로 하지. 그러니까, 여기에 잠자코 있으라고!" 파우스트는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주눅든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주눅이 들기는 했지만 얌전히 당하기만 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뻔뻔하고 건방진 태도를 밀어붙이기로 했던 것이다. 갑자기 파우스트가 강하게 나오자 아녜스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제와서 강경하게 나오다니. 나 때문에 들키고 싶나?" "글세, 어디 하고 싶으면 해 보라지. 하지만, 마음대로는 안될거다." "무슨 말이지?" 파우스트는 아녜스의 물음에 직접 대답하는 것 대신에 데르플링거에게 명령을 내렸다. "데르플링거. 저 건방진 여자를 구속해!" "으음... 알았어." 데르플링거는 아녜스를 뒤에서 팔을 붙잡는 식으로 구속했다. "네 녀석...!" 아녜스는 기분나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파우스트는 오히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흥, 내가 언제까지나 당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차라리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뭐, 하지만 난 관대하니까... 물 한 잔 정도는 떠오기로 하지." 그 말을 남기고 파우스트는 수통을 집어든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바깥을 주의깊게 살핀 다음,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거의 들리지 않는 발소리로 집에서 멀어졌다. 파우스트가 멀어지자, 데르플링거는 아녜스를 구속한 팔을 풀었다. 그녀가 집 밖으로 일부로 나가려고는 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데르플링거의 예상대로 아녜스는 그냥 제자리에 걸터앉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런 아녜스에게 데르플링거는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당신에게 이런 고약한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다시 봤어." "으읏, 아니, 그건..." 제 3자에게 지적당한 다음에야 자신이 좀 지나치게 오버했다는 걸 깨달은 아녜스는 약간 쑥쓰러워 했으나, 금새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뭐, 좀 너무하기는 했지. 확실히 '나답지는 않은 행동'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자기 변호를 하는 아녜스에게 쓴웃음을 지으면서 데르플링거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로 당신답지 않은 행동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차라리 잘 되었는지도 몰라." "뭐가 말인가?" "파트너가 스스로 집 밖으로 나간 거 말이야." "무슨 의미지?" "파트너는 아가씨에게 들킬 위험이 있는 시간대에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한시적으로 금기로 삼고 있었어. 그랬는데, 본의이든 아니든 파트너는 지금 그 금기를 스스로 깨어버렸지. 원래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라 해도 한 두 가지 부분에서 풀리기 시작하면 금방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법인데, 이는 파트너라고 해도 다르진 않아. 이왕에 나가지 않겠다는 금기를 깬 상태니까 원래대로라면 할 생각이 없었던 다른 것을 할 생각이 들게 될 지도 모를 일이야." 아녜스는 데르플링거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지금의 일이 저 녀석의 행동에 변화를 줄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뭐,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일 뿐이야.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파트너가 결정할 일이지." '뭐, 뭐야?' 파우스트는 급히 자신의 몸을 낮추면서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근처에 있는 집 뒤로 숨은 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어떤 상황인지를 확인했다. 문이 열린 집은 티파니아의 집이었고, 그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티파니아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루이즈와 세실리,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파우스트가 그들을 피해 허겁지겁 숨은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루, 루이즈랑... 아녜스의 부하였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세실리였나?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일이긴 하지만, 들켰으면 위험할 뻔 했군. 하필 이런 묘한 타이밍에 밖으로 나오다니...' 파우스트는 속으로 안도하면서도 시선을 두 사람으로부터 떼지 않았다. 아주 늦은 밤은 아니라고 해도 갑자기 집 밖으로 나온 영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저 녀석들, 대체 뭐 하러 이 시간에 밖으로 나온거야?' 일단 물을 뜨러가는 작업을 보류한 파우스트는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나 대충 확인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루이즈의 뒤에 따라붙은 세실리가 일정 간격을 움직일 때마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더욱 더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잠깐 동안의 스토킹(...) 결과, 두 사람이 마을의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파우스트는 적당히 상황을 추측했다. '일단 발걸음은 마을 밖으로 향하고 있지만... 지금 여기를 떠나려고 하는 건 아닐거야. 세실리라는 여자가 메고 있었던, 짐을 챙겨놓았을 가방도 없는데다가, 비밀 임무라도 수행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런 밤중에 떠나야 할 이유는 없을테니 말이지. 뭐, 그렇다면... 달밤에 산책이나 할 생각이려나? 그렇다면 머지 않아 돌아올 테니까 난 저 녀석들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그 짜증나는 아줌마에게 물이나 갖다줘야겠군.' 나름대로 정황을 살핀 파우스트는 다시 마을 안쪽에 있는 우물가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다가, 잠시 멈췄다. '가만있자... 물을 뜨러 간 사이에 녀석들이 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잖아? 멋도 모르고 움직이다가 우연찮게 마주치기라도 하면 제법 귀찮아지겠지? 그럴 바에야... 녀석들이 돌아오는 것을 미리 감지할 수 있도록 마을 입구의 약간 바깥쪽의 조금 떨어진 곳에 영혼의 복합 감각기라도 배치해 두자고. 그렇게 하면 녀석들이 돌아오는 걸 미리 알아차릴 수 있을테니까 위험 부담은 줄어들겠지?' 위험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한 파우스트는 마을의 입구까지 조심스럽게 걸어간 뒤, 정신력을 집중해서 주변의 영혼 중 하나와 교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영혼에게 청각과 시각을 부여한 뒤, 그 위치를 마을의 입구에서 약 30m 정도 떨어진 장소로 지정했다. 그 다음에 배치된 영혼과 영적인 상호 링크를 개방하자, 그 주변의 모습과 소리가 파우스트의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그나저나... 저 녀석들에게 딱히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밤중에 짐승을 만날 일은 없을테고, 도적 같은 놈들이 이런 숲속의 외딴 마을을 밤중에 습격할 일도 없을테니 말이야. 거기에 일단은 총사대 대원이라는 녀석도 붙어 있으니까 뭐...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별 다른 위험이야 없겠지.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저 녀석들 걱정을 하고 있는거야?' 파우스트는 혹시 두 사람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요소에 대해서 잠깐 고민하기는 했으나, 딱히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했던 자기 자신을 책망하면서 말이다. 가장 경계해야 할 두 사람이 일단 마을 밖으로 나간 뒤였기 때문에, 그 뒤로 파우스트의 움직임에는 특별한 제약같은 것이 없었다. 아무런 장애도 없이 우물가에 도착한 파우스트는 얼른 이 귀찮은 일을 끝내고 은신처로 사용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우물의 뚜껑을 열고 그 속으로 두레박을 내린 뒤, 물이 가득 찬 두레박을 끌어올려 그 안에 든 물로 수통을 채웠다. "뭐, 일단은 이 정도면 되겠지? 근데, 두레박으로 물을 뜨는 작업도 반복적으로 하면 제법 체력적으로 부담이 있을 것 같군. 그 물을 옮기는 작업 역시 두 말하면 잔소리일테고... 이거, 아무래도 나중에 필요한 물을 확보할 때는 데르플링거 녀석에게 시켜야겠군." 그렇게 다시금 데르플링거를 부려먹을 생각을 하면서 수통을 들고 은신처인 집으로 향려던 파우스트의 머릿속에 심상치 않은 정보가 전달되었다. 마을의 입구 바깥에 배치했던 영혼의 복합 감각기로부터 '총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뭐, 뭐야...? 총성이라니?' 아마도 총사대 대원인 세실리가 휴대하고 있는 권총이 발사되는 소리였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정확한 거리까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장소는 아닌 것 같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제법 불안한 예감이 든 파우스트의 머릿속으로 또 다시 영혼의 복합 감각기로부터 전달되는 총성이 들려왔다. 연거푸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세실리의 능력 만으로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에게 뭔가 위험이 닥친 건가? 빌어먹을... 일단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확인이나 해 봐야겠군!' 제법 까다로운 상황이 벌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파우스트는 일단은 침착하게 전투 준비부터 했다. 긴박한 상황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섯불리 움직였다가는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파우스트는 데르플링거가 사냥해온 멧돼지의 뼈를 모아두었던 장소로 향했다. 그 뼈를 사용해서 스켈레톤 워리어를 제작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알비온 7만 대군을 상대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파우스트에게는 88기의 스켈레톤 워리어를 제작할 수 있는 뼈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주하던 과정에서 71기를 잃었고, 일순간 파우스트의 심장이 멈췄던 시점에서 나머지 스켈레톤 워리어들도 단순한 뼈다귀로 돌아가버린 뒤였다. 데르플링거가 응급조치의 일환으로써 파우스트의 심장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다시 박동시키기는 했지만, 그 뒤로는 파우스트를 치료할 수 있을 마을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바닥에 널브러졌던 뼈들을 회수할 시간적 여유 따위는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어떠한 뼈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임시방편으로 멧돼지의 뼈를 사용해서 스켈레톤 워리어를 제작하려고 했다. 그냥 살코기만 발라진 채 버려진 뼈도 있었지만 일부의 뼈는 구이에 포함되어 구워지거나 국물을 내기 위해 끓여지는 등 조리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전투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불안한 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조금도 없었다. 모은 멧돼지 뼈를 이용해서 5기의 스켈레톤 워리어를 제작한 파우스트는, 영혼의 복합 감각기로부터 총성이 들려왔던 방향으로 황급히 움직였다. 수풀을 헤집으면서 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으로 움직이던 파우스트는 숲 가운데에 있는 공터 근처에 도착했다. 공터의 가장자리는 나무의 그림자로 인해 어둑어둑했지만, 나무가 없는 가운데는 2개의 달에서부터 비치는 빛과 여기저기에 돋은 발광성 버섯으로 인해 제법 밝은 편이었다. 그 공터의 가운데에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는 두 무리가 파우스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한 무리는 갑옷을 입고서 칼이나 메이스, 장창이나 할버드 등으로 무장한 병사들... 처럼 보이는 수십기의 가고일들과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검은 로브를 눌러쓴 사람이었다. 가고일은 마법적인 힘으로 움직이는 인형으로 용도에 따라 어떠한 모습이든지 할 수 있는 마법 도구였으나, 하르케기니아 대륙 출신이 아닌 파우스트는 이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었다. 그저, 이들이 마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이들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로브로 몸을 가린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실루엣으로 봐서 상대가 여성이라는 것 정도만 파악할 수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무리는... 그들과 대치상태에 놓여있는 다른 무리와 비교했을 때 '무리'라고 부르는 것 조차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원이 적었다. 루이즈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약간 앞에 서서는 사브르를 뽑아든 세실리가 전부였던 것이다. 세실리의 발치에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부싯돌 점화식 권총들이 떨어져 있었다. 파우스트가 들었던 총성은 이들 권총들로부터 나왔던 모양이었다. 연발이 가능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쏘기 위해서는 총알을 재장전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길고 복잡하기 때문에 재장전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장전이 된 권총 여러 개를 가지고 다니는 편이 더 나은 것이다. 파우스트는 이러한 대치 상황을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지점에서 나무의 뒤에 숨은 채 이 상황을 그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었다. '녀석들을 습격한 건 저 여자와 인형(파우스트는 '가고일'이라는 명칭을 모른다.)들인가? 우연히 만났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니까 틀림없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보낸 거겠지. 루이즈를 노린 것으로 봐서... 아마도 루이즈가 허무의 사용자라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말이야. 대체 누군지는 짐작할 수도 없지만... 알비온과의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제법 골치아픈 일이로군. 조만간에 알비온 이외의 또 다른 세력으로 인해 제법 난리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니 말이야. 뭐...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 눈앞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인데...' 파우스트는 짧은 시간동안 이번 일의 배후관계에 대한 생각까지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일단은,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 문제였다. 대략적인 눈짐작으로 적 '인형'들의 숫자는 약 100기에 이르렀지만, 그에 반해 파우스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켈레톤 워리어들의 숫자는 겨우 5기에 불과했다. 적 인형의 단일 개체의 전투력이 스켈레톤 워리어와 비교해서 어떤가를 알지는 못하지만, 만약 파우스트의 저주가 더해지면 확실하게 개체 단위의 전투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숫자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전투 과정에서 파손된 스켈레톤 워리어는 복구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5기의 스켈레톤 워리어만으로 적 인형의 움직임을 모두 커버할 수는 없다. 이는 모든 인형이 스켈레톤 워리어에게만 달려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으며, 무엇보다 저쪽에는 인형들을 조종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본 프리즌으로 두 사람을 전투에서 차단시켜 놓거나 본 월을 사용해서 적이 제대로 된 포위공격을 가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저쪽에서 대응하는 방법에 따라 그것도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사람의 안전 뿐만이 아니라 파우스트 그 자신의 목숨도 보장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렇게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난점도 있지만, 파우스트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건...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저 녀석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난 아직 저 녀석에게 제대로 사과도 받지 않았다고! 이런 상황에서 루이즈 녀석을 구하는 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도 전에 내가 루이즈 녀석을 용서해 버렸다는 식으로 녀석에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를 일이잖아? 그랬다간 루이즈 녀석은 틀림없이 기고만장하게 행동하겠지. 일단 내가 저 녀석을 구해버린 다음에는 내가 뭐라고 짜증을 내 봐야 루이즈 녀석은 그냥 생색내기 정도로만 받아들일 거라고! 겉으로는 차갑게 대해도 본심은 어쩌니 저쩌니... 따위의 생각을 할 것임에 틀림이 없어! 이래가지고는 내가 바라는대로 상황이 흘러가질 않아! 그 녀석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을 수가... 없게 된다고! 그럼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여전히 파우스트가 지금 상황에서 루이즈를 만나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적 인형들이 두 사람을 공격하려고 달려든다면 파우스트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입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서로간에 대치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다른 생각을, 그러니까 자신이 굳이 루이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집착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즉, 파우스트는 여전히 최악의 상황에 빠져있었던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줬던 루이즈를 순순히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파우스트는 제대로 사과를 받지도 않은 상황에서 루이즈를 구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속보이는 행동을 했다는 인상을 루이즈에게 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고, 이는 곧바로 파우스트의 자존심 문제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아... 어쩌다가 상황이 이런 식으로 꼬여버린 거야? 그냥 루이즈 녀석을 순순히 구해주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해서 루이즈 녀석에게 위해가 가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딱히 녀석이 걱정된다기 보다는 이대로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사과를 받고 자시고 간에 그런 가능성 자체가 사라져 버리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만 말이야. 아무튼, 어느 쪽이라고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로군. 빌어먹을...' 그렇게 갈등에 빠진 파우스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난감한 상황이 놓여있는 것과는 별개로, 대치상태에 놓여있는 당사자들 간에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다시 묻겠어. 네놈은 누구냐? 이름을 대라!" 세실리가 뽑아든 사브르를 상대에게 겨누면서 그녀의 정체에 대해 추궁했다. 다시 묻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몇 차례 추궁을 했던 모양이었다. 총은 이전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상대 여성이 여유 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름을 대라고? 내가 이름을 말해봐야 그쪽이 내 정체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는데?" "뭐라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이지. 뭐, 정 궁금하다면 알려주지 못할 건 없어.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난 '셰필드'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어. 이것도 어차피 가명이지만 부르고 싶다면 이걸로 불러줘." "장난치자는 건가?" "그렇지 않아. 뭐, 어차피 난 그쪽에게는 볼 일이 없거든? 내가 볼 일이 있는 쪽은 네 뒤에 있는 아가씨니까 말이야." 자신을 셰필드라고 칭한 여자는 손가락을 세실리의 뒤에 있는 루이즈에게 가리켰다. "만나서 반갑군, 미스 발리에르. 위대한 '허무의 사용자'여." "에엣?" 허무의 사용자라는 말에 세실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루이즈도 잠깐 멈칫 했지만, 이내 상대에 대한 불쾌감과 약간의 의혹의 빛을 얼굴에 띄웠다. "그걸 알고 있다니, 당신의 배후는 대체 누구지? 뭘 위해서 그렇게 많은 가고일들을 데려 온거야?" 평소의 루이즈라면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면서 주눅이 들 법한 상황이었지만, 루이즈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고 결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목소리에서도 딱히 동요하는 기색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언제라도 주문을 영창할 수 있도록 지팡이를 상대에게 겨누고 있기까지 했다. '저 녀석... 못 보던 사이에 제법 배짱이 늘기라도 한 건가? 지금쯤이면 공포로 몸이 떨리면서 갈팡질팡 해야 할 시점일텐데 말이지.' 이는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파우스트 조차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루이즈의 부정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는 파우스트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나 몸의 움직임을 통해 그녀의 감정 상태를 파악해왔었는데, 지금의 루이즈는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결연한 상태였던 것이다. "배후에 대한 질문에는 답해줄 수 없어. 하지만, 허가를 받은 데까지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지. 일단은...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 '아주 약간만' 이야기해 주기로 할까?" "당신이 가진 능력?" "그래. 혹시 말이야, 어째서 내가 이렇게나 많은 숫자의 가고일들을 한꺼번에 조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어?" "아...!" 셰필드의 말을 들은 루이즈는 그제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들어낸 메이지가 내리는 명령 밖에는 수행할 수 없는 골렘과는 달리 가고일은 독립적인 유사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형이다. 이런 가고일의 의지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하는 데에는 골렘 이상의 마력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 앞의 여자는 거의 100기에 가까운 숫자의 가고일들을 한꺼번에 조종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무리 뛰어난 메이지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가고일을 한꺼번에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지금 셰필드는 틀림없이 별 무리없이 이 숫자의 가고일을 한꺼번에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 루이즈가 의문을 품었을 때, 셰필드가 문득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명색이 메이지라면서 이 상황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네 간달브였던 네크로맨서'가 수 많은 해골들을 조종하다 보니까 거기에 익숙해진 모양이지?" "뭐, 뭐라고?!" 셰필드가 파우스트가 간달브라는 사실과 네크로맨서라는 것까지 이야기하자 루이즈는 이전과 비교해서 확연히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루이즈의 모습을 본 셰필드의 후드 아래에 드러난 입술이 일그러진 듯한 웃음을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있지? 네 사역마에 대한 정보는 네가 허무의 사용자라는 사실보다도 먼저 입수되었다고. 뭐... 그 네크로맨서는 '신의 왼손'인 '간달브'의 능력, 그러니까 모든 종류의 무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말이지. 하긴, 그 녀석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새로 얻은 능력 보다는 기존에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더 애착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 설령 그 능력이 죽은 시체나 조종하는, 역겹기 짝이 없는 타락한 존재의 기술인 네크로맨시라고 해도 말이야." "...!" 네크로맨시라는 기술에 대해서 분명한 혐오감과 모욕이 담긴 셰필드의 말에 루이즈는 분노의 기색이 강하게 드러난 표정을 지었다. 루이즈는 그런 말을 하는 셰필드의 모습이 전쟁 기간동안 네크로맨시라는 것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을 이용해서 파우스트의 심신을 괴롭게 만들었던 수뇌부들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렸던 파우스트에게 네크로맨시를 버리라고 말함으로써 그에게 큰 상처를 줬던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였던 것이다. 수뇌부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었던 루이즈에게 있어서 셰필드가 네크로맨시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은 그녀가 가진 죄책감을 자극함과 동시에, 그 자체 만으로도 그녀를 분노하게끔 만드는데 충분했다. 세필드는 루이즈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또 다시 놀라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얻은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그 네크로맨서 자식과 내가 어떤 의미에서는 '동류'라는 사실이 왠지 기분이 나쁘군. 뭐,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겠지." "동류... 라니?" "이걸 봐라." 셰필드는 자신의 얼굴 위쪽 절반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들췄고, 그러자 지금껏 후드에 가려졌던 셰필드의 이마가 드러났다. 세필드의 이마에는 고대의 룬 문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룬 문자를 본 루이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면서 그 표정이 굳어졌다. "그, 그 룬은..." "본 적이 있겠지? 네 사역마였던 녀석의 왼쪽 손등에 이것과 같은 룬이 새겨져 있었을거야." "그렇다는 건... 설마, 당신도...?" 경악에 찬 표정을 지은 루이즈에게 셰필드는 음침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의 의혹에 대답했다. "그래, 나 역시 허무의 사역마야. '신의 두뇌'인 '묘드니트니른'이지. 이 룬이 나에게 부여하는 능력은, 모든 종류의 마법 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 혼자서 이렇게나 많은 숫자의 가고일들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는 거지." "그럴수가... 허무의 사역마가 또 있었다니... 그렇다는 건, 나 이외의 또 다른 허무의 사용자가 당신의 배후란 말이야?" "후후, 이야기가 그렇게 되려나?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쨌든 난 목적만 수행하면 그만이니 말이지. 이쯤에서 네가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야. 얌전히 네가 가진 '시조의 기도서'와 '물의 루비'를 내놓거나, 아니면..." 루이즈는 불쾌한 표정으로 뒤를 이었다. "...저항하다가 쓰러진 뒤에 빼앗기든가, 말이야?" "뭐야, 잘 알고 있잖아? 이야기를 할 수고를 덜었군. 자, 그럼 어떻게 할래? 너도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겠지? 난 살인에 익숙하기는 해도 가급적이면 피를 보고 싶지는 않거든?" "그런 인형들 뒤에 숨어서 거드름이나 떠는 주제에 바보 취급하지 마!" 루이즈는 짧게 영창한 '디스펠 매직'을 적 가고일 중 하나에게 사용했다. 가고일도 명색이 마법 도구인지라 디스펠 매직을 맞자 단순한 금속 조각이 되면서 쓰러졌다. '저 녀석...! 지금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먼저 도발하면 어쩌자는 거야?!'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파우스트는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 자신 역시 승산이 없어보이는 싸움에 임한 적도 많은데다 '도발'이 주특기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루이즈가 그러는 것을 보자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므로 다소 불안해졌던 것이다. 만약 루이즈의 공격으로 자극을 받은 셰필드가 전 가고일들을 한꺼번에 돌격시키면 1번에 1기 정도만 상대할 수 있는 루이즈로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주문을 영창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야 언젠가 안드바리의 반지의 힘으로 조종당하던 알비온 귀족들의 시체들과 싸울 떄 그랬던 것처럼 한 번에 상황을 종결시킬 수도 있겠지만, 루이즈와 세실리가 자력으로 그런 시간을 벌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셰필드는 루이즈의 적대적인 행동에 그닥 신경을 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뭐야. 잘나신 메이지 님은, 그것도 허무의 사용자께서는 무기를 든 병사가 우습게 보이나 보지? 하지만 방심하지 않는 편이 좋을껄? 이 가고일들은 '스키르니르'라고 하는, 피를 흡수한 대상의 모습과 능력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고대의 매직 아이템이야. 평범한 전사라고 해서 얕보지는 않는 게 좋을거라고.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들은 어느 것이나 과거의 역사에서 '메이지 암살자'로 통하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더군.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야 나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창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너 정도를 상대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으읏...!" 루이즈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역시 파우스트가 알던 루이즈보다는 좀 더 결연하고 확고한 의지 같은 것이 엿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파우스트를 더 의아하게 했다. '저 녀석... 대체 뭣 때문에 저렇게 태연해 보이는 거지? 달리 뭔가 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뭣보다, 그런 걸 생각할 줄 아는 녀석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런 루이즈의 모습은 파우스트 뿐만이 아니라 셰필드도 의아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호오, 생각했던 것 보다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은걸? 용기가 대단한 걸까, 아니면 겁을 먹은 나머지 이성을 상실한 걸까?" 셰필드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면서 루이즈를 도발하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고,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신호가 된 모양인지 가고일들이 일제히 천천히 루이즈와 세실리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약 10m 앞 지점까지 도착한 가고일 무리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위협적으로 겨누었다. 이 상황에는 세실리도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왼손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오른손에 쥔 사브르는 여전히 적에게 겨누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거,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이로군. 이대로 가다가는 위험할 것 같은데... 물론 가만히 놔 둘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파우스트가 슬슬 난입해야 할 때라는 것을 느끼고는 긴장하면서도,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역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루이즈에게 제대로 사과를 받고 싶은 생각이 남아있었던 탓에 약간은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문득 루이즈가 입을 열었다. "난 원래 용기있는 인간은 아니야. 오히려 나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도 못하는 겁쟁이야. 줄곳 나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느끼면서 살아왔으니까... 이제와서 허무의 힘을 각성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내게 용기를 주지는 않아. 더 이상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게 되었지만. 사실은... 지금도 무척 무서워. 누군가 날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하, 그래? 그런 것 치곤 말과 표정이 일치되지 않는 모습인데? 몸이 떨리는 것 치고는 의외로 의연한 반응이잖아. 아무래도 순순히 시조의 기도서와 물의 루비를 건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 "그래, 그건 건내줄 수 없어. 어차피 내가 순순히 그것들을 준다고 해서 날 곱게 돌려보내지는 않을테지?" "후, 그거야 뭐... 네가 하기에 달렸지. 하지만 지금 하는 걸로 봐서는 기어코 피를 보겠다는 모양이지?" "그럴 리가 없잖아!" 루이즈는 짧게 디스펠 매직의 룬을 외우면서 지팡이를 휘둘렀고, 또 하나의 가고일이 박살났다. 셰필드는 그런 루이즈의 저항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하하하! 정말이지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네! 제대로 주문을 영창할 수도 없는 주제에 싸움을 하자는 거냐? 웃기지도 않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되는 거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명줄을 재촉하다니, 참으로 가소롭구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파우스트도 지금만큼은 노골적으로 루이즈를 비웃기 시작하는 셰필드와 같은 생각이었다. '아아, 정말이지... 대체 저 녀석 왜 저러는거야? 이해할 수가 없잖아! 왜 저렇게 늘 제멋대로인 거냐고? 왜 항상 자기가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벌이냔 말이야!' 그렇게 파우스트가 안타까움에 짜증이 섞인 복잡한 의혹에 빠져있을 때, 루이즈가 문득 대답했다.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그녀가 점점 공포감에 지배당하기 시작하는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의지가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포기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이라는게 있잖아? 지금의 상황이 나에게 있어서 바로 그거야." "무슨 말이냐?" "나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난 절대로 여기에서 죽을 수 없다고!" "호오, 그래? 그 일이 뭔지 어디 한 번 들어주기나 할까?" 셰필드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자신이 절대적인 우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생겨나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것 자체만으로 루이즈에게 도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루이즈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파우스트를... 당신이 지금껏 '네크로맨서'라고 부르면서 조롱했던 녀석을... 작년 봄에 있었던 신춘 사역마 소환 의식에서 처음 만났어. 솔직히 말해서, 첫 인상은 정말로 최악이었어. 인간이 사역마로 소환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혹스러운 일이기도 했거니와, 외모나 인상도 위험할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외모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녀석은 성격도 최악이었어. 귀족에 대한 예의를 알기는 고사하고 귀족에게 반감까지 가지고 있는데다 건방지고 제멋대로에 자존심까지 강한 녀석이었으니 말이야. 사역마 계약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런 녀석에게 내 첫 키스를 허용하는 것 역시 내키지 않았어. 그것 뿐인 줄 알아? 일반적으로 계약을 하고 나면 주인에게 고분고분해지는게 당연한 것이 사역마인데, 그 녀석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어. 내 말을 듣기는 커녕 툭 하면 나에게 시비를 걸어서 말싸움이나 하기 일쑤였지. 그래서 정말로 마음에 안들었는데... 그러던 차에, 그 녀석이 네크로맨시와 저주가 특기라는 사실까지 우연히 알게 되었어. 그걸 알고 나니까 정말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지. 죽은 자의 시체를 조종하는데다 저주까지 걸다니... 이건 완전히 옛날 이야기나 소설에서 딱 악역으로 나올법한 존재잖아? 대체 왜 내가 이런 녀석을 소환하게 되었는지... 한 때는 정말로 내 운명에 어찌 이리도 기구하단 말인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울해하기도 했었어." 잠자코 루이즈의 말을 듣고 있었던 파우스트는 표정이 구겨졌다. 당사자가 듣기에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듣자듣자 하니까 정말이지.... 저 녀석, 대체 뭐라고 하는거야? 누군 좋아서 소환된 줄 알아? 그보다, 이 시점에서 저 이야기는 왜 하는건데?'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진 이야기부터는 루이즈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약간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그랬었는데... 막상 지내 보니까,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늘상 의견이 안맞아서 자주 싸우기만 하는 건 여전했지만, 파우스트는 불평하면서도 내가 곤란할 때에는 늘 도와줬으니까 말이야. 내가 무리한 일을 자청해서 맡았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시점이 왔을 때 그 녀석은 자신이 대신 나섰고, 지나치게 풀이 죽었을 때에는 나름대로 격려... 라기 보다는 조언을 해 주기도 했지. 그 녀석 덕분에 난 번번히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내가 허무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실마리를 얻기도 했으며... 결국에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나를 괴롭혔던, 귀족이면서 마법을 사용할 줄도 모른다는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도 있었어. 이쯤 되니까 그 녀석에 대한 내 생각도 많이 바뀔 수 밖에 없게 되었어.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 녀석이라고 말이지. 비록 건방진데다 쓸데없이 자존심도 강한, 제법 성격이 꼬인 인간이라고는 해도 말이야."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쑥쓰러워진 파우스트는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눈 아래의 얼굴을 가렸다. 가려진 틈으로 살짝 엿보이는 홍조는 얼굴 피부가 손바닥에 눌려서 피가 모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길... 낮 간지러운 소리 하고 있네. 대체 의도가 뭐야? 게다가 이런 소릴 그냥 들어주고 있는 저 셰필드라는 녀석은 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파우스트는 고개를 돌려 셰필드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셰필드는 루이즈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흥미가 있다는 정도라기 보다는 뭔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어. 그건, 파우스트가 네크로맨시나 저주 같은 게 특기라는 사실이었지. 그 녀석은 내게 네크로맨시든 다른 무슨 마법이든지 간에 결국에는 수단일 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했었어. 나 자신은 그 말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런지에 대해서는 좀 많이 불안했어. 그 녀석이 실은 제법 좋은 녀석이라는 사실이 네크로맨시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악의적인 편견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지. 그러던 차에 트리스테인-게르마니아 연합국과 알비온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어. 난 지금껏 마법도 못쓴다면서 무시당해왔던 걸 만회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려고 했고, 파우스트도 그리 달갑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내 의사를 존중해 줬지. 그리고... 이 전쟁 기간동안 내가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현실이 되고 말았어." 루이즈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전쟁에 참가하게 되니까 난 허무의 힘을 사용한 일부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고, 파우스트 역시 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지.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모두 수행했었어. 하지만, 실질적으로 고생했던 건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었지. 난 그저 녀석의 호위를 받으면서 목적지까지 간 다음 허무의 힘을 사용하기만 했을 뿐, 목적지에 가는 과정부터 나와 다른 동료들의 목숨을 지키는 것은 전부 그 녀석의 몫이었어.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실은 누군가가 죽는 걸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파우스트는 나를 포함한 동료들의 목숨을 지켰을 뿐만이 아니라 적군 병사의 목숨도 빼앗지 않았어. 그런 녀석에게... 연합군의 수뇌부들은 파우스트가 네크로맨서라는 이유 하나로 너무나도 끔찍한 짓을 해버렸지... 그들은 파우스트의 능력 자체는 인정했었어.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면 혼자서 수 백명의 병사들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인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 녀석의 능력 뿐, 그를 '인간'으로써 인정하지는 않았어. 그의 전공을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모든 병사와 도시의 시민들 앞에서 그가 알비온 세력과 한통속이었던 추악한 존재였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우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그가 상대했던 알비온의 음모 조차도 그의 소행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고는 반나절 동안이나 조리돌림을 시켰어! 난 수뇌부를 찾아가 이런 가혹한 조치에 항의하려 했지만, 내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오히려 자신들의 도덕적 문제점을 모두 그 녀석에게 뒤집어 씌우는 편이 나라를 위해서 더 이익이라는 말까지 했었지. 그렇게 조리돌림이 끝난 뒤에 돌아온 파우스트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어버렸어. 그렇게나 자신만만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했던 녀석이...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에도 화들짝 놀라면서 피하려고 하는, 대인공포증에 걸려버렸으니까 말이야. 그나마 나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마 그 녀석 나름대로 나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야.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들으면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말이지.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난 너무나도 화가 났고, 동시에 무척이나 슬펐어. 파우스트는 내 의사를 존중해서 전장에까지 와서는 날 도왔을 뿐인데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녀석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비인간적인 수뇌부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꼈고, 그들의 거짓된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크로맨시에 대해서 얼마나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알게 되자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지. 네크로맨시를 사용한다는 것 하나 때문에 그의 좋은 점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악당으로 취급해버리는 현실이 싫었다고. 이렇게까지 되니까... 난 그 녀석이 차라리 네크로맨시를 버리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어. 그 네크로맨시 하나 때문에 파우스트가 온갖 오해와 멸시를 당해야만 하는 거라면, 차라리 그걸 버리는 편이 그를 위해서 더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거야..." 이야기를 계속 할 수록 루이즈의 표정은 점차 괴로운 것으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죄책감이 어린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내 이런 생각을 파우스트에게 말했어. 계속 네크로맨시를 사용해 봐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해 주지도, 인정하지도 못할 테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는 걸 그만 두고 다른 마법을 익히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을 했었지. 난 더 이상 그 녀석이 악의적인 편견과 오해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었어.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했던 이 말은 도저히 그 녀석에게 용납이 될 수 없었던 것이었어. 그 녀석에게 있어서 네크로맨시는 단순한 마법이 아니라 그 녀석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도 관계가 있었던... 말 그대로 '그가 가진 전부'이자 '포기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이었던 거지. 그렇게 네크로맨시와 자기 자신을 불가분의 관계로 여기던 녀석과는 달리, 난 파우스트라는 개인과 네크로맨시를 분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난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녀석의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가혹한 행동을 해버렸지. 아마 파우스트는... 내가 한 말을 듣고 나에 대해서 무척이나 환멸을 느꼈을거야. 대인공포증에 걸렸으면서도 나를 피해서 다른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으니까..." '저, 저 녀석...' 파우스트는 점점 루이즈의 이야기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 루이즈가 한 말은 '파우스트가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뭔가 잘못을 한 것 같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루이즈 자신이 파우스트에게 한 잘못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쯤되자, 파우스트는 그가 생각했던 상황,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공적을 인정 받은 뒤에야 루이즈에게 거만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에게 정말로 잘못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그런 생각을 애써 부정하려고 했다. '아, 아니... 아직이다. 이걸로는 부족해. 루이즈 녀석이 날 조금 생각해줬다는 이유 만으로 저 녀석을 그냥 쉽게 용서할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그렇게 파우스트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려고 했으나... 루이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황이 그렇게 되고 나서야 난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고... 제대로 사과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지금껏 파우스트는 수 차례에 걸쳐 내 목숨을 도와주기도 하고 나에게 조언도 하는 등, 정말로 나를 많이 도와줬는데... 난 제대로 된 감사를 하기는 커녕 벼랑끝에 몰려있었던 그 녀석의 등을 떠밀어버리는 짓을 해버렸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야. 어떻게 해서든 녀석을 찾아서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 갑자기 반란이 일어났어. 어쩌다보니 난 도주하는 연합군에 휩쓸려 같이 로사이스에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간신히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었어. 예상대로 그 녀서은 내게 악감정을 품은 모양인지 날 무시하려고 했지만, 난 사과의 말 만큼은 전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억지로 붙잡고서라도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 하지만... 또 다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 사령부에서 날 호출하더니, 철수 시간을 벌기 위해서 나 혼자서 로사이스로 진격해오는 알비온 군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거지. 이렇게 되자... 난 그 녀석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고 했어. 트리스테인의 긍지높은 귀족이자, 전쟁에 참가한 하나의 국민으로서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고...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남은 연합군이 몰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이게 내가 그 녀석에게 한 배은으로 인한 벌이라고도 생각했었어. 물론 정말로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그래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랬었는데, 내가 사령부로터 받은 명령서를 강제로 본 그 녀석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았어. 나에게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을 텐데도... 나를 걱정해주는 것도 모자라서, 결국에는 나에게 수면제와 이상한 약을 같이 먹이고는, 내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수뇌부에게 글을 쓴 다음, 그 녀석 스스로가 멋대로 내게 내려진 명령을 대리 수행하기 위해 사지로 향해버렸어! 그리고는... 정말로 알비온 군의 진격을 혼자서 하루 동안이나 막아버리는 기적같은 일을 행했어. 그 자신은 돌아오지도 못했지만 말이야..." "그, 그런..." 비록 루이즈를 학원에서 알비온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데다 루이즈의 '수색 작업'을 도와주기로도 했지만, 그런 자초지종까지 알지 못했던 세실리는 루이즈의 이야기를 듣자 제법 마음이 동한 모양이었다. 한편, "..." 셰필드 역시 의외로 루이즈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순순히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즈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눈치는 결코 아니었다. 루이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 나름대로 뭔가 생각할 부분이 있었는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퇴각이 끝난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죄책감에 빠졌어. 파우스트는 내게 소환된 이후 줄곧 나를 곁에서 도와주기도 했고 지켜주기도 했었고,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는 나에게 내려졌던, 힘들고 까다롭지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최선을 다했어. 그렇게 그 녀석은 나를 도와줬지만... 난 그 녀석을 위해 제대로 해준 것이 없었어. 수뇌부들이 자신들의 공적 확보와 선전을 위해 그 녀석에게 온갖 비인도적인 행위를 가해도 그것을 막아주지 못했고, 그 녀석이 가장 힘들 때 도움을 주기는 커녕 더 큰 괴로움만을 준 것도 모자라... 결국 나 대신에 사지로 대신 향하게 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으니까 말이야.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무력감에 빠진 나는 전후 보고에도 참가하지 못했고, 결국 수뇌부들이 그들 마음대로 파우스트의 공적을 없던 것으로 보고하는 것 조차 막지 못했어. 결국 그 녀석이 목숨을 걸고 세운 마지막 공적 역시 없던 일이 되어버렸던 거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 정말로 그 녀석에게 고개를 들 수도 없는 행동만 했었지만, 그래도 그 녀석과 다시 만나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던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서몬 서번트 주문을 외웠어. 만약 녀석이 살아있다면 나에게는 사역마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주문이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결국 주문은 실행되었고 소환 게이트는 열려버렸어. 정말로 그 녀석이 죽어버렸다고 판단한 나는 사과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매일매일을 괴롭게 보냈지.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그 녀석이 죽어버려서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설령 녀석이 살아있다고 해도... 수뇌부들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녀석을 더더욱 공개적으로 모함하면서 입막음을 시켜버린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7만명의 대군을 막아내는 능력을 가진 위험한 존재라는 핑계로 제거하려고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렇게 끝까지 치욕스러운 최후를 맞이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 녀석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상태가 더 낫다고 생각했었어..." '야. 루이즈, 너...' 이제 파우스트의 동요는 더더욱 심해졌다. 루이즈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 분명해지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룬이 소멸되었다는 상황을 생각지도 못한 루이즈가 자기가 죽어버렸다고 착각하면서 줄곧 괴로워해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녀의 감정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고 자기 생각만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건 오히려 파우스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루이즈의 이야기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알비온에서 전후 회의에 참가하던 여왕 폐하가 나를 호출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명령대로 일단 알비온에 도착한 뒤, 여왕 폐하께서는 파우스트가 혼자서 알비온 군의 진격을 막아냈다는 사실을 당시 알비온 군의 장군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를 내게 하셨어. 그 과정에서... 그 누구의 목숨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까지도 함께 말이야. 그제서야, 난 그 녀석이 왜 그렇게나 무모한 일을 시도하려고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 파우스트는 네크로맨시를 사용하고도 아무도 죽이지 않으면서 성공적으로 알비온 군의 진격까지 차단함으로써, 네크로맨시가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살육에나 쓰이는 추악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 역시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써 증명하고 싶었던 거라는 걸 말이야. 파우스트의 목숨을 건 노력은 뒤늦게나마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어. 그 행동에 적국의 장군마저도 감화되어 여왕 폐하에게 그 녀석을 영웅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도록 만들었고, 여왕 폐하 역시 그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말이야. 거기에다, 그 내용이 수뇌부들로부터 받았던 보고와는 너무 달랐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은 여왕 폐하는 나로 하여금 여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대로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어. 상을 내릴 자와 벌을 내릴 자를 확실하게 구분하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말이야. 그게 여왕 폐하께서 날 알비온까지 부르신 목적이었던 거지. 그제서야 난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 그 녀석의 실추되었던 명예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이자... 그 녀석에게 갖은 모욕을 가했던 자들에 대한 복수까지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걸 말이야. 그래서... 난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어. 뭔가를 꾸밀 필요도 없이, 그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여왕 폐하를 기만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이것으로 일단 파우스트를 괴롭게 만들었던 자들에 대한 복수는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했어. 잘은 모르겠지만 본국으로 돌아가신 여왕 폐하께서 처벌을 내리셨을테니 말이야. 하지만... 파우스트를 괴롭게 만들었던 자들에는 나 역시 포함되어 있어. 즉, 이대로는 아직 그 녀석에 대한 사죄가 끝나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난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다가... 그 녀석을 찾기로 했어. 어딘가에서 살아있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서몬 서번트 주문을 통해 그 녀석이 죽었다는 것이 확실시 된 이상... 어딘가에서 잠들어있을 그 녀석의 시신이라도 찾아 수습하기로 결심했지. 이제 머지않아 공식적으로 트리스테인의 영웅으로서 재평가될 그 녀석의 시신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쓸쓸하게 썩어가고 있을 거라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말이야... 이게 바로...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난 반드시 여기에서 살아남아야만 해!" 이것으로 루이즈는 셰필드에게 그녀의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세필드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영향을 줬다. "그게 당신의 사정이었군요... 알겠습니다. 난 기필코 여기에서 당신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우기로 하죠." 상황이 지나치게 불리했기에 조금 전까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세실리는 루이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사적으로 싸우겠다는 각오를 새로 다졌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이즈의 이야기는 세실리보다도 숨어서 듣고 있던 파우스트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루이즈의 이야기는 루이즈가 진심으로 파우스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알비온의 7만 대군을 상대할 때 단 1명의 인간도 죽이지 않는다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선택을 했던 이유까지도 완전하게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던 것이다. '루이즈... 이 망할 계집애야! 지금 네가 날... 날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는 줄 알기는 해? 그 입으로 사과를 듣기 위해서라면 네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어떤 기분으로 지내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나도 쪼잔하고 우습게 보인단 말이야! 빌어먹을... 날 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이렇게나 쪽팔릴 수 있다니...! 루이즈 너... 내게 이런 굴욕을 겪도록 만들었단 말이지? 정말로... 정말로 제법이잖아!' 상황이 이쯤 되자, 파우스트에게 있어서 루이즈에게 기필코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사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루이즈가 그에게 직접 사과를 한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루이즈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까지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 표정 만큼은 웃고 있었다. 지금껏 숱한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고통받고 상처받아왔던 그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자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사실, 루이즈가 이렇게나 파우스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데르플링거의 공이었다. 루이즈와 파우스트가 갈등을 일으켜 파우스트가 루이즈로부터 도망쳤던 바로 그날 밤, 데르플링거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루이즈에게 파우스트의 처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루이즈는 그 이후의 파우스트의 행동 심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지금 파우스트로 하여금 루이즈에 대한 악감정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르플링거가 아녜스에게 말했던 '밑밥'이었다. 원래 데르플링거의 의도는 차후에 파우스트와 루이즈가 만났을 상황을 가정해서 대화를 통해 화해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두는 것이었다. 지금은 비록 직접적으로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루이즈의 심정에 대해서 파우스트가 들은 것 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는 있었으니... 이는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데르플링거의 의도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파우스트와는 달리 루이즈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이나 기분이 나빠진듯한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셰필드였다. "...뭐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거지? 추악한 네크로맨서 따위에 대한 연민 때문에 죽을 수 없다고? 웃기지 마! 네녀석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네크로맨서는 본질적으로 악마와 계약을 맺은 혐오스럽고, 반드시 배제되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그런 놈 따위에게 마음을 쓰다니... 소용없는 짓이다!" 복잡한 표정으로 잠자코 루이즈의 이야기를 듣던 세필드는 맹렬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모양이긴 했지만, 어째서 그렇게나 분노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네크로맨서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렇게나 혐오스러운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파우스트는 그녀로부터 '질투'의 감정을 감각할 수 있었다. '질투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루이즈의 이야기에서 그 자신에게는 없는 뭔가를 들었고, 거기에서 열등감을 느끼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파우스트가 가만히 숨어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순 없었다. "시끄러워! 파우스트를... 그 녀석을 모욕하지 마!" "닥쳐라! 아무리 생각해도... 네 녀석은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널 죽이고, 시조의 기도서와 물의 루비를 빼앗겠다!" 셰필드의 외침과 함께, 100기 가량의 가고일들이 일제히 루이즈와 세실리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사실, 파우스트는 어찌되었든 셰필드가 공격을 가하면 루이즈와 세실리가 죽지 않도록 끼어들 생각이었다. 비록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의 한 쪽 구석에서 주저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파우스트에게는 이제는 그런 일말의 주저함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떠한 주저도 없이, 싸움에 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올 테면 와 봐라!" 세실리는 기합을 외치면서 이판사판으로 달려들 준비를 했고, 루이즈 역시 허무의 주문을 외우기 위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아무리 승산없는 싸움이라 해도, 이것 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어스름한 달빛과 희미한 발광성 버섯 이외에는 어떠한 광원도 존재하지 않았던 공터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모든 가고일들의 머리 위에서, 붉은 색과 주황색이 혼재된 불꽃이 생성되었던 것이다. "어어...?!" 이 불꽃을 본 루이즈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입을 떡 벌린 채,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뜨릴 뻔 했다. 이 불꽃이 무엇인지 루이즈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불꽃이야말로 바로 파우스트가 사용했던 엠플리파이 데미지 저주의 징표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그 불꽃이 생성됨과 동시에, 옆쪽 수풀에서 새하얀 뭔가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뼈로 만들어진 듯한 투구와 칼, 그리고 방패를 든 해골로, 아무리 봐도 파우스트가 종종 사용했던 스켈레톤 워리어였다. "어어어엇-?!" 한밤중에 갑자기 움직이는 해골이 튀어나오는 것은 기절할 정도로 놀랄 상황이었지만, 루이즈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해골 자체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적 가고일들에게 저주가 걸리고 스켈레톤 워리어가 튀어나와서는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는 것은 루이즈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었다. 이미 죽어버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체념하고 포기해버렸던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서, 설마..." 완전히 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희망의 불꽃이 다시금 발화하기 시작했을 때, 그 불꽃이 더욱 명확해질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루이즈의 뒤에서 아주 그리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멋대로 사람을 죽이지는 말라고, 이 멍청아." 조금도 다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막말에 가까운 비아냥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루이즈의 기억속에 남아있었던 누군가의 어조와 더 똑같이 들리는 목소리였다. 루이즈는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그 이름을 불렀다. "파, 파우스트?!" 하지만, 뒤돌아본 자리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방금과 똑같은 목소리가 루이즈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는 정면이었던 장소에서 들려왔다. "뭘 허둥거리고 있지? 어서 주문이나 영창하라고! 시간은 끌어줄테니까!" 다시 원래대로 고개를 돌린 루이즈의 눈에 한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은 기억속의 그것과 달랐고, 기억보다도 좀 더 길어진 은발의 소유자였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가진 남성의 모습이 말이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헀던 루이즈는 정말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상대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이름을 다시 불렀다. "파우스트... 정말로 파우스트야?" 하지만 그는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는 대답을 대신해서 루이즈를 윽박질렀다. "난 분명히 영창이나 외우라고 했을텐데? 못 보던 사이에 귀라도 먹은거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쯤되자 루이즈는 눈앞의 상대가 파우스트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히 소환 게이트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어떻게 그가 살아있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가 여기에 있는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등... 묻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지금이 그럴만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고는 질문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정도로 충분했다. "알았어!" 대답을 마친 뒤, 루이즈는 허무의 주문 디스펠 매직을 처음부터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 영창소리를 들으면서, 파우스트는 어떻게 자신이 숫적으로 불리한 이 상황에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되면 이제 난 시간만 벌면 되는 거겠지?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나? 아이언 메이든 저주를 거는 건... 당장에 가고일들의 숫자를 어느 정도 줄일 순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가고일들의 타겟이 스켈레톤 워리어가 아닌 나나 루이즈, 세실리 같은 인간으로 바뀔거야. 어차피 박살날 바에는 스켈레톤 워리어와 싸우느니 차라리 주 목적 대상을 바로 공격하려고 들겠지. 아, 가만. 벌써 스켈레톤 워리어 1기가 박살났잖아? 이것들... 공격력이나 움직임이나... 제법 만만치 않은 모양인데? 일단 복구부터! 제길, 이래가지고는 본 월로 막아봐야 금방 부숴버릴 것 같아. 부숴진 본 월 뒤에 새로 본 월을 짓는다고 해도 결국 거리는 좁혀지겠지... 그렇다면... 그걸 한 번 해 보기로 할까? 어차피 시험해볼 필요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생각보다 가고일들의 전투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스켈레톤 워리어를 사용한 전투는 사실상 포기했다. 그 대신, 가고일 전체에게 디크레피파이 저주를 걸어 그 움직임을 둔화시킨 다음, 그 무리로부터 이쪽을 차단시키는 본 월을 설치했다. 디크레피파이 저주로 인해 가고일들의 움직임과 공격력이 상당히 줄어들것은 분명했지만, 아직 이 정도로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던 파우스트는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오늘 점심 식사 시간에 아녜스와의 대화를 통해 떠오른 발상이었으나, 식사가 끝난 뒤에는 소녀들에게 붙잡혔고, 그 뒤로는 갑자기 나타난 루이즈로 인해 그 발상을 검증할 시간도 없었다. 그것을 이 상황에서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파우스트는 그가 꿈 속에서 겪었던 경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 원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 자체는 익힌 상태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선천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던 그의 능력으로는 감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랬는데... 오늘 점심 식사 도중에 아녜스가 왼손잡이라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오른팔 힘이 강했던 파우스트에게 이 점에 대해서 질문을 했었다. 파우스트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굳이 아녜스에게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 정도는 했다. 모종의 일로 인해 뼈만 남아버린 팔꿈치 아래의 팔에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집어넣어서 조종하는, 이른바 신체의 강제조종 방식으로 오른팔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파우스트는 자신의 오른팔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있다는 사실에 새롭게 주목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오른팔에 신체의 강제조종을 사용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오른팔에 든 것은 '다른 사람의 영혼'인 것이다. 이 사실과, 자신이 '타인의 영혼과 감각의 전이가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영혼 그 자체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합산하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제시되는 것이다. [신체의 강제조종으로 인해 오른팔에 든 영혼에게 자신이 경험을 통해 익힌, 원소 마법을 사용하는 감각을 전이시켜 그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원소 마법을 실행하도록 함으로써 간접적인 방식으로 상황에 따라 필요한 원소 마법을 사용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발상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기에 다른 존재로부터 능력을 빌려오는 방식'을 사용하는 라스마의 사제들의 마법 사용 방식과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파우스트는 이 발상대로 시험해보았다. 머릿속에서 불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감각을 떠올린 후, 그 감각을 오른팔에 든 영혼으로 전달했던 것이다. 그러자, 오른손에서 실제로 불이 생성되었다. 마치 꿈에서 그랬던 것 처럼, 장갑을 태우지는 않고 장갑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불이 생성된 것이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발상이 실제로 성공하자, 파우스트는 희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오, 정말로 성공했단 말이지... 이 기술의 이름은 '간접적 시전(Indirect Casting)'정도로 해둘까? 이대로라면 파이어 골렘을 만드는데에 제법 시간이 단축되겠군. 기존의 방식으로 파이어 골렘 제작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의 절반은 공기의 마찰을 통해 불꽃을 생성하는 시간이니까 말이야. 뭐...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파이어 골렘이 아니야.' 파우스트는 그가 꿈속에서 시도해봤던 여러 종류의 마법 중 지금 상황에 가장 적합할 것 같은 마법을 시도했다. 광범위한 지역에 육중한 얼음의 칼날을 떨어뜨림으로써 적에게 괴멸적인 타격과 함께 결빙 효과를 주는 소서리스들의 마법, 블리자드(Blizzard)가 그것이었다. 만약 성공만 한다면 굳이 루이즈가 외우고 있는 허무의 영창과는 상관없이 상황을 종결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른손에서 생성되는 건 기껏해야 냉기였을 뿐, 블리자드가 시전되지는 않았다. '제길... 역시 이런 간접적인 방식으로 고차원적인 마법을 쓸 수는 없다는 건가? 조금 분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사용하는 기술의 한계점을 미리 인식해 두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멋도 모르고 까불다가 자멸하는 법.' 약간의 실망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우스트는 자신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한계 내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는 방법 역시도 궁리할 줄 아는 인간이기도 했다. '블리자드와 같은 거창한 마법을 쓰기는 고사하고 기껏해야 냉기 정도가 한계라고 해도, 이걸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있군. 꿈속에서도 같은 짓을 했던 것 같은데, 이 정도의 냉기 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것 뿐이겠지.' 파우스트는 간접적 시전을 통해 오른손으로 냉기를 만든 다음, 자신의 영혼을 분화시켜 그 냉기 자체에 집어넣었다. 이는 골렘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고... 이 과정을 통해 실제로 골렘이 완성되었다. 특별한 실체를 가지지 않은 매개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파이어 골렘과 유사했지만, 그 능력은 정확하게 상반된 골렘인, 이른바 '프로스트 골렘(Frost Golem)'이 완성된 것이다. 파이어 골렘과 마찬가지로 일단 생성이 되면 내부에 든 영혼의 힘으로 그 존재가 유지되는 원소 계열의 골렘이었다. 이미 꿈속에서 불 이외의 다른 원소를 가지고 골렘을 제작했었던 파우스트는 이 골렘의 능력에 대해서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프로스트 골렘이 완성되었을 때, 지금껏 양쪽을 가로막고 있던 본 월이 가고일들에게 붕괴되었다. 디크레피파이 저주로 인해 공격력과 움직임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여전히 위험한 수준이었다. 루이즈의 영창도 거의 다 끝나가는 상황이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가고일들이 루이즈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새롭게 전투에 투입된 프로스트 골렘이 능력을 발휘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파이어 골렘이 '홀리 파이어(Holy Fire)' 오라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이 프로스트 골렘은 '홀리 프리즈(Holy Freeze)' 오라를 사용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디크레피파이 저주로 움직임이 제법 느려진 가고일들이 홀리 프리즈 오라의 영향까지 받아 이중으로 움직임에 방해를 받게 되자, 그 이동 속도는 말 그대로 달팽이가 기어가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이 상태라면 파우스트가 별도의 행동을 취하디 않더라도, 루이즈의 영창이 끝날 때까지 가고일들에게 방해를 받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뭐, 뭐야...? 냉기로 이루어진 골렘이라니... 이런 건 듣도보도 못했어!' 파우스트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입수했던 세필드였으나, 이 프로스트 골렘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가고일들이 무력화될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셰필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직접 나서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다른 마법 도구들도 있으니까...' 세필드는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에 두르고 있는 망토를 벗으려고 했으나, 바로 그 때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둔 소녀의 그것처럼 된 것이다. "조제프님!" 셰필드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전해진 목소리의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그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째서입니까! 제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을 해치워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은 셰필드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군요. '허무' 대 '허무'로 대국을 즐기시겠다는 겁니까? 알겠습니다. 단순히 '비보'와 '반지'를 모아다 놓고 바라만 보는 것 보다는 분명히 즐거우시겠죠. 그럼, 지금은 이 정도로 물러가기로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셰필드는 즉시 그 자리에서 이탈했고, 바로 그 다음 순간, 영창을 마친 루이즈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이 넓은 공터의 거의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디스펠 매직은 모든 가고일들과 그들에게 돌격했던 프로스트 골렘까지도 한꺼번에 소멸시켜 버렸고, 이윽고 숲은 정적에 감싸였다. 잠깐 동안의 정적을 깬 것은 루이즈의 애절한 목소리였다. "파, 파우스트... 맞지? 부디 얼굴을... 보여 줘..." 계속 등을 돌리고 있었던 파우스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그 나름대로 루이즈를 용서하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루이즈를 마주보게 되려니 조금 쑥쓰럽기도 했고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애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루이즈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파우스트의 목소리와 실루엣, 그리고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파우스트 특유의 은발 다음으로 루이즈가 감각한 파우스트의 얼굴은... "...어, 어라?" ...루이즈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그것과 닮은 구석을 찾기가 너무나도 힘들었기 때문에 루이즈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분명 루이즈의 기억 속에서는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홀쭉한 탓에 제법 흉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이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는데... 지금 눈 앞에 있는 남자는 그것과 확연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백 머리에 적당히 마른 갸름한 얼굴, 오똑한 콧날, 짙은 은빛 눈썹에 좌청우녹의 오드아이 등등... 심하게 말랐다는 것을 제외한 전반적인 특징은 파우스트의 그것과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파우스트와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가 알던 파우스트와는 달리(...), 이 남자는 분명히 말해서 미남 기준(여자같은 외모가 아니라, 분명히 남자라는 느낌을 주는 외모.)에 들어가기에 부족하지 않았고, 나이대 역시 소년과 청년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등 연령대를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기억속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 루이즈에게 파우스트는 그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차가운 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뭐냐, 루이즈. 내가 조금 '비대해지기는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솔직히 좀 너무한 거 아니야?" 그 표정은 파우스트의 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흉악한 수준은 아니었고 약간의 악의어린 장난기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루이즈는 잠깐동안 멍한 표정으로 파우스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갑자기 그에게 울면서 달려들었다. "파, 파우스트!" "야, 루이즈?! 자, 잠깐!" 갑자기 루이즈가 자신을 향해 도움닫기를 하다가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다이빙을 하자 당황한 파우스트는 몸을 움찔거리다가 루이즈와 충돌,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크으윽-!" 루이즈는 그런 파우스트의 몸 위에서 그의 가슴을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네가 죽은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 줄 알아...?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었단 말이야!" 울음섞인 목소리로 파우스트를 안으면서 그 동안의 슬펐던 감정과 함께 재회의 기쁨을 드러내기기 시작하는 루이즈의 모습은 제법 감동적이긴 했다. "정말... 잘 되었네요." 세실리도 이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 루이즈..." 루이즈에게 깔린 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파우스트의 목소리에서는 루이즈와는 달리 그 동안의 슬픔이나 재회의 기쁨 같은 것이 조금도 드러나있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의 기색이 느껴지고 있었다. "파, 파우스트...?" 이런 파우스트의 반응에 의아함을 품은 루이즈는 그의 가슴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파우스트의 표정을 살폈고, "어, 어라?" 이내 그의 표정이 분노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고 눈가에는 약간이지만 눈물까지 고여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고 말았다. "왜, 왜 그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루이즈의 물음에 파우스트는 고함으로 답했다. "당장 내려와, 이 멍청아! 네 녀석의 바보같은 박치기 때문에 쓰러지다가 돌에 부딫혔단 말이다! 지금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고!" "뭐, 뭐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