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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깻네요 ㅋㅋ
으아 역시..
by 유복도 at 01/29 우와 나왔네요 ㅎㅎ 맞다.. by 히로군 at 01/29 안녕하세요. 만고쿠입.. by 만고쿠 at 01/29 John님의 성공을 기원.. by 재윤 at 01/29 3등은 동메달입니다. 1.. by 해방자 at 01/29 그러므로 우리는 트리스.. by 해방자 at 01/29 아아 만화와 라이트노벨.. by 해방자 at 01/29 헐... 1등이 아니네? .. by 조폭네크가짱 at 01/29 아... 18분 차로 1등을 .. by 해방자 at 01/29 뭐, 여왕도 학원측의 .. by ... at 01/29 |
* 제 147화 : 공손한 불청객.
얼마 전까지 파우스트 자신과 루이즈만이 살고 있었던 '해골들의 저택'에는 달리 갈 데가 없어진 샤를로트와 실피드, 엘자를 비롯한 북화단 기사단원이 둘이 새로 들어왔다. 이들에 이어서 샤를로트와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이유로 퀴르케가 들어왔고, 당분간 교사 일을 그만두고 오스트란트 호의 개조에 전력을 다하라는 왕정부의 명령을 받은 콜베르도 그녀의 손에 이끌려 왔다. 이렇게 인원이 늘어나자 파우스트는 요리를 담당할 주방장을 하나 새로 고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엘레오노르가 갑작스럽게 저택을 찾아왔다. 원래 거주하고 있던 아카데미 소속 연구원들의 기숙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융기'의 징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엘레오노르는 그녀 혼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용가마 마부를 포함한 수행원 5명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저택의 거주 인원은 순식간에 6명이 늘어나게 되었다. 아카데미에 출근하는 엘레오노르와 용가마 마부는 하루 중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저택에 없다고는 하지만, 저택에서 상주하는 인원이 4명이 더 늘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4명은 저택 내부의 청소나 정리와 같은 가사를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되었지만, 먹을 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주방장 한 명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파우스트는 새로 주방장을 보조할 요리사 한 명을 새로 고용해야만 했다. 파우스트는 이 비용까지 엘레오노르에게 청구할지를 고민했으나, 그녀가 데려온 하인들이 가사를 돕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자신의 자금을 사용했다. 엘레오노르가 들어온 이후 파우스트는 더 이상 해골들의 저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엘레오노르가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난 날의 정오 무렵, 곧 점심 식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해골들의 저택의 2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에 멍하니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던 파우스트는 자신의 방 창문을 두들기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응?" 그 소리에 파우스트는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풍경 이외에는 달리 없었다. 하지만 창 밖에서부터 어떤 생물의 영혼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흐음, 전서구라도 온 모양인가?' 파우스트가 창가까지 걸어가 창문을 열자, 그의 예상대로 창문 밖에 걸터앉아 창틀을 부리로 쪼고 있던 전서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전서구는 기다렸다는 듯 날개짓을 하며 창 안으로 날아들어오더니 파우스트가 앉아있는 의자 앞의 테이블에 가만히 착지하고는 편지가 들어있는 가느다란 통이 묶여있는 왼쪽 다리가 파우스트의 정면으로 향하도록 몸을 돌렸다. 파우스트가 통의 뚜껑을 열어 편지를 꺼내자, 전서구는 기다렸다는 듯 날아올라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전서구가 날아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파우스트는 그것이 가져온 편지의 겉봉을 확인했다. 겉봉에는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의 이름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흐음,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라... 그 대머리에게 온 건가?' 겉봉을 확인할 때만 하더라도 파우스트는 그 편지가 콜베르에게 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이유가 딱히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해당 학원의 교사인 콜베르에게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편지의 겉봉의 맨 아래에 쓰여있는 수취인은 콜베르가 아닌 파우스트 자신이었던 것이다. '응? 내게 보낸 거라고? 뭣 때문에?' 학원에서 자신에게 용건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파우스트는 의아함으로 눈가를 찡그리면서 편지를 펼치고는 그 내용을 읽었다. 편지를 보낸 것은 학원장 오스만이었는데, 그 내용 자체는 매우 간단했다. '뭐야... 티파니아 녀석을 이곳으로 보냈다고? 아니, 대체 왜?' 편지 자체는 매우 짤막한 내용 뿐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우선은 편지의 글귀가 '보낼 것이다.'라는 미래형 문장이 아니라 '보냈다.'는 과거형 문장으로 작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티파니아를 보내놓은 상태에서 그 사실만을 통보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파우스트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신경쓰이는 점은 어째서 티파니아를 이곳으로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조금도 설명되어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자신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티파니아를 여기로 보냈다면 최소한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이유라도 설명을 해야 할 터인데, 이 편지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적혀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다못해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라도 적혀있었으면 파우스트도 학원측의 일방적인 일처리에 대해서 조금은 수긍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파우스트로서는 살짝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바로 그 때, 저택 안마당 쪽에서 뭔가 육중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우스트는 바로 요 며칠 전에도 이것과 거의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가구를 모조리 챙겨왔던 엘레오노르 때와 비교하면 덜 둔중한 소리이긴 했지만, 아무튼 단순히 내려앉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 무거운 생물이 몸을 움직이는 듯한 이 소리는 틀림없이 용가마가 지면에 안착할 때에 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뭣이? 벌써 왔다고?' 티파니아가 자신의 저택에 찾아온다고 한들 파우스트는 딱히 그녀를 위한 환영 준비를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곧 점심시간이 되고 두 명의 요리사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 한 명이 늘어난다고 해봐야 한 자리를 더 마련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기 때문에 영 못마땅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용가마에서 내린 티파니아가 커다란 가방을 든 채 긴장한 기색으로 현관문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후우... 뭐, 하는 수 없나.' 거창한 환영 파티를 열 생각이 아니라고 해도, 저택의 주인으로서 집에 찾아온 손님(비록 불청객이라 해도.)을 무시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에다 티파니아는파우스트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파우스트라 해도 그녀를 문전박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방에서 나와 1층의 중앙 홀과 연결되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자, 이미 티파니아의 등장을 확인한 저택 내부의 다른 사람들이 현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창문을 통해 티파니아가 용가마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퀴르케였다. "어머, 티파니아까지 여기에 올 줄이야. 학원에서 용가마까지 준비한 걸 보니 뭔가 사정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나의 쟝, 혹시 여기에 대해서 아는 건 있나요?" "글쎄, 당분간 학원과는 상관이 없어진 나로서는 잘 모르겠군. 그보다, 미스 체르프스트. 그 호칭은, 뭐라고 해야 하나... 조금 삼가주면 안 되겠나?" "죄송해요. 그건 무리랍니다~♡" "..." 아무리 봐도 이 두 사람의 관계의 주도권은 퀴르케가 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콜베르는 퀴르케에게 딱히 흑심을 품고 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달라붙으려는 그녀를 상대하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어울려주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루이즈. 최근 들어서 이 저택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느낌이지 않아?" "그야 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렇기야 하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렇게 늘어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다 여자잖아? 나와 샤를로트, 북화단 기사단원 둘과 너의 큰 언니 및 메이드들에 이르기까지... 쟝과 고용된 요리사 둘을 제외하면 전부 다 여자야." "...우, 우연이야." 짓궂은 표정으로 얼굴에 가학성을 드러낸 퀴르케의 의도를 짐작한 루이즈는 애써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이미 발동이 들어간 퀴르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연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문제야? 넌 기껏 큰 마음을 먹고 고백까지 했는데, 그 녀석으로부터 확답도 못 들었잖니? 그래서 적잖이 불안할 텐데, 매정한 그 이의 주변에는 점점 다른 여자들이 몰려들고... 아핫, 물론 난 아니니까 쓸데없는 경계하지는 마. 내게는 쟝 뿐인걸." "으읏...!"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루이즈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그녀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었던 직접적인 고백의 결과물이 '연애 대상으로서의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식의 반쪽짜리 대답이었던 것으로 비롯된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파우스트가 루이즈에게 조금도 '가능성'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이 정도라고 해도 진전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파우스트가 '다른 후보'라는 말을 꺼냈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파우스트가 다른 여자들에게 딱히 관심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퀴르케의 말에 동요하고 말았던 것이다. "거 참, 밖에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뭘 그렇게 떠들고 있어?" 그렇게 퀴르케가 루이즈를 놀려먹고 있을 때, 파우스트는 그런 말을 하면서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퀴르케가 주도하는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 것은 파우스트에게 있어서 낯간지러운 일이었기에 훼방을 놓고 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절한 구실도 없이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려고 했다가는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해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꺼낸 것이다. 파우스트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티파니아의 방문이 도움이 된 셈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중단시킨 파우스트는 현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난처한 기색으로 쭈뻣쭈뻣 거리며 어색하게 서 있는 티파니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한 티파니아의 모습은 그녀가 원래 소극적인 성격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여기에 오게 된 것 자체가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 서둘러 보냈다는 사실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옷차림새는 교복 복장이었다. "어서 들어오지 않겠어? 기껏 여기까지 찾아 왔으면서 가만히 서 있을 건 없잖아." "아, 응..." "이제 곧 점심 식사준비가 다 되어가는 모양이니, 네가 여기에 오게 된 사정에 대해서는 같이 식사라도 들면서 이야기 하자고." "응, 그럼 실례할게." 그리고 잠시 후, 저택의 1층에 위치하는 식당으로 저택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카데미로 출근한 엘레오노르와 용가마 마부, 그리고 북화단 기사단원 두 명을 제외한 주요 인물들이 원탁에 앉았고, 엘레오노르가 데려온 메이드들이 음식을 날라오고 있었다. 저택의 식당에 배치된 테이블이 일반적인 귀족의 저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긴 테이블이 아니라 원탁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그 모양이 같은 원탁에는 상석(上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재 파우스트는 이 저택의 주인이므로 긴 테이블에서는 상석에 앉게 되겠지만, 파우스트는 '자신이 귀족들이나 따지는 자리의 높낮이 개념에 구애되는 것'이 싫었다. 비록 무작정 귀족을 혐오하던 시기는 지나갔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파우스트는 스스로가 귀족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귀족의 사생아라는 출생 과정에서부터 생츄어리와 이 세계의 귀족들에 의해 겪었던 온갖 괴로운 경험들은 파우스트에게 있어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지금껏 몇 차례나 귀족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해서 거절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 귀족이든 아니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성전에 휘말리게 될 거라는 점은 똑같으니까 말이야. 이종족간에 벌어지는, 살아갈 땅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기 때문에 그 양상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할 거라고. 여기에서 지게 되는 쪽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터... 빌어먹을, 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싸움의 원인이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린 이상, 이대로 성전이 벌어진다면 인간이나 엘프나 상대 종족을 몰살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려 할 것이 분명했다. 양쪽 모두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라 성전은 기정 사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지금껏 성전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던 파우스트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세계의 수호자 넬우얼과의 대화는 이러한 파우스트를 더더욱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넬우얼이 한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성전이 인간이나 엘프라는 종(種)의 멸망을 넘어 세계 그 자체의 멸망의 전조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안 그래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태인 성전의 위험성을 더더욱 가중시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물론 넬우얼은 과거에 있었던 일의 실마리에 대한 힌트를 알려주었고, 그것을 위해 파우스트에게 엘프들이 사는 땅으로 찾아갈 것이라는 앞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적의 본거지로 찾아가라는 말은 그냥 죽으러 가라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설령 이야기가 잘 풀려서 과거의 일에 대한 실마리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6천년 전에 있었던 인간과 엘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원인에 대해서 알아낸다 하더라도, 지금 양측이 처한 상황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으므로 사이좋게 화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후우... 내가 뭐 역사가도 아니고, 과거에 있었던 일의 진상만을 파악하기 위해 엘프를 찾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하지만, 트랑굴과 같은 존재인 넬우얼이 내게 직접 찾아와서 이러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건... 그런 역사적 사실 이외에 달리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기는 해. 하지만 문제는 그게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고, 그 불확실한 이유로 내가 저 위험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는 건 좀...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정말 내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지금까지 파우스트는 온갖 위험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적어도 그럴 때에는 뭔가 확실하고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생츄어리에 있을 때에는 지옥의 3대 군주를 쓰러뜨리고 동료 라스마의 사제들이 인정받도록 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이 세계로 소환된 이후에도 자신의 생존이나 다른 사람들(특히 루이즈)의 목숨, 혹은 다른 누군가가 초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는 눈에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성전과 그로 인해 야기될 세계 멸망의 위기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방도가 서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분명하지 않았고, 설령 그것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고작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파우스트의 고민은 넬우얼과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거듭되며 그를 괴롭혀왔던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령에 빠져드는 느낌이었지만, 파우스트도 지금은 여기에 대한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식사를 마무리하고는 홍차를 마시면서 티파니아와 최근의 근황에 대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파우스트가 개별 접시에 덜어놓은 음식을 조금 남겨둔 채 식기까지 내려놓고는 깊은 고심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시선이 모였던 것이다. '정말이지,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더 골치만 아파지는 일이로군. 하지만... 내가 이야기 하자고 식사에 불러 놓았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기는 하겠어.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순 없겠지.' 결국 파우스트는 다시 식기를 들고 접시위에 올려져 있는 음식을 적당히 목구멍으로 넘긴 뒤, 티파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이거 실례. 잠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야. 그럼, 본래 하려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지." 파우스트는 자신의 고민에 대해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대충 얼버무리고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했다. 최근들어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루이즈가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낌새가 느껴졌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시키는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솔직히 아까 전에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 편지가 날아왔을 때에는 무척 놀랐다고. 편지에 뭐라고 쓰여있었던 줄 알아?" "그, 글쎄...?" "그 편지에는 '너를 내 저택으로 보냈다.'라는 내용이 전부였어. '보내겠다.'도, '보낼테니 준비해달라.'도 아니고 말이야. 하아, 정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어. 내 양해는 조금도 구하지 않고 무턱대고 너부터 보내놓은 다음, 그제서야 기억났다는 듯 부랴부랴 편지를 휘갈겨서 보냈다는 거잖아? 그게 전략적인 성공을 위해서 기습적인 침공을 시작한 직후에 구색을 갖추기 위해 보내는 선전포고문이었다면 차라리 이해는 할 수 있었겠지만, 이건 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하하..." "또한 그 편지에는 어째서 너를 저택으로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조금도 되어있지 않았어. 아무래도 급하게 진행될만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상황에 대한 설명 정도는 있었어야 하잖아? 거기에 더욱 가관인 것은 그 편지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네가 도착했다는 거야. 정말이지, 대체 이럴거면 그 늙은이(학원장 오스만)는 뭐하러 편지를 보냈는지 모르겠군." "아하..." 파우스트는 영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학원측의 행동에 대해서 투덜거렸다. 물론 파우스트도 티파니아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그의 투덜거림은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는 식이 아닌, 불쾌한 일을 겪은 것에 대해서 일종의 하소연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듣고 있던 티파니아는 자신이 조금 전 겪었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네가 그렇게 불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확실히 오늘은 모든 절차에 있어서 지나치게 서두른 감이 있었거든. 수업을 듣던 도중에 갑자기 선생님 한 분이 날 찾아오시더니 최대한 빨리 짐을 싸라고 하셨고, 대체 무슨 일인지 사정에 대해서 듣고 있으려니 어느 새 마당에 용가마가 준비되서 그걸 타고 여기로 왔으니까 말이야." "흐음, 일의 경과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널 이 저택으로 보내는 것은 학원 측의 예정에도 없었던 모양이로군. 그럼 대체 누가 널... 내 저택에 보내도록 시킨거지?" 파우스트는 상황을 말로 정리해가며 티파니아에게 이번 일을 주도한 배후에 대해서 물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짐작이 갔다.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은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기관인 만큼 기본적으로 학생들을 규율로써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물론 그들의 학부모인 귀족들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어지간한 귀족의 입김은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입장인 학원이 예정에도 없던 일을 위해 그렇게나 급하게 움직였다는 것은 '트리스테인에서 가장 권위있는 집단', 즉 왕궁의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파우스트도 여기까지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여기에 대해서 티파니아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기도 했지만, 자신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대화를 그대로 진행했다.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여왕 폐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셨다는 모양이야." "역시나... 그런데, 무슨 이유로?" 파우스트는 티파니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가도록 한 사람이 앙리에타라는 점은 금방 파악했지만, 앙리에타가 어떠한 이유로 티파니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보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대화의 맥을 끊어버리는 것보다는 티파니아가 그녀가 여기로 온 이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파우스트가 멍석을 깔아주자, 티파니아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알비온 왕가의 바람의 루비'를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너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이제 성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또 강력한 엘프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완전한 허무의 힘이 필수적...이지? 그래서 여왕 폐하께서는 가능한 한 '네 가지 넷'을 한데 모아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야." "호오, 그래?" 앙리에타의 지시 자체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렇게나 급하게 서둘러 행동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가지 넷이 모인다 한들, 어차피 교황과 줄리오, 그리고 갈리아의 허무의 사용자 '후보' 겸 '가짜 샤를로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조제트까지 모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모두 모이게 될 때와 장소는 실제로 성전이 일어난 이후의 전장이 될 터였다. 거기에 대해서 파우스트가 의문을 품었을 때, 티파니아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더 이야기했다. "물론 교황 성하와 줄리오, 그리고 갈리아의 허무의 사용자 후보인 조제트는 저마다 수행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끼리 같이 지내는 정도가 되겠지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여기서 해야할 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 아마도 그게 다른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유인 모양이야." "호오, 그게 대체 뭐길래 꼭 여기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거지?" "사역마 소환." "...뭐?"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네 가지 넷'은 4개의 비보, 4개의 루비, 네 명의 사용자, 그리고 네 명의 사역마를 의미하는 것인 만큼, 네 가지 넷이 모두 모인다는 것은 티파니아 또한 사역마를 소환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직 '후보'에 불과한 조제트는 둘째로 치더라도, 허무의 사용자 중에서 아직껏 사역마를 소환하지 않은 건 티파니아 뿐이었으므로 그녀가 사역마를 소환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학원에서는 매년 봄에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춘 사역마 소환의식을 하기는 하지만, 내게 있어서 그건 내년 봄의 일이니까 그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다고 나만 먼저 사역마를 소환하면 다들 이상하게 여길 게 분명하고, 또한 나의 사역마로 나오게 될 존재는 다른 허무의 사역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될 테니까 설명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하긴, 그래. 확실히 학원에서 네가 사역마를 소환하는 건 이래저래 문제가 되는 점이 많을 것 같군. 쓸데없이 떠들기 좋아하는 귀족 애송이들이 화젯거리로 삼기에는 충분한 일이니 무척이나 귀찮게 굴겠지." "그렇겠지?"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퀴르케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티파니아의 소환에 불려오게 되어 '계약'하게 될 사람은 대체 어디의 누가 될까? 궁금하지 않니?" "물론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건 소환이 끝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니까..." "어머, 그렇게 태평한 소리가 나올 상황이 아닐텐데? 넌 걱정되지도 않아?" "거, 걱정?" 지금 퀴르케가 짓고있는 짓궂은 표정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는 그녀가 조금 전 한 말에 포함되어 있었다. 퀴르케의 의도를 파악한 파우스트는 조금 거북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고, 샤를로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뀨이! 아, 그거 혹시..." "잠시 가만히 있어줘." "뀨이." 심지어 실피드조차 퀴르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서 뭔가 말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사전에 퀴르케에게 제지당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티파니아는 '걱정'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혼자 생각하더니 나름대로 여기에 대해서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으음... 확실히 걱정스럽기는 해. 어떤 사람이 내 사역마로 소환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마법을 통해 내 앞으로 불려나와서는 다짜고짜 성전에 참가하는 핵심적인 중책을 떠맡게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럽고 또 죄송하다는 생각도 들어." 이 대답은 상냥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풍부한 티파니아다운 말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퀴르케가 의도했던 부분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아직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사역마가 될 사람에 대해서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는 티파니아의 순진한 반응에 퀴르케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어, 어머나! 넌 어쩜 애가 이렇게나 기특하니! 자기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보다도 거기에 말려들 다른 사람의 걱정을 하다니 말이야!" "그, 그게 이상한 걸까?" "그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 자신이 걱정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어?" "나 자신이? 으음... 아!" 퀴르케의 말에 다시금 생각에 잠긴 티파니아는 잠시 후 자신이 방금 떠올린 부분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 어쩌면... 사역마로 소환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엘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뭐, 뭐어? 풉!" 자신이 의도한 바를 알아차리기는 커녕, 점점 더 참신한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해나가는 티파니아를 보고 있으려니 퀴르케는 점점 더 웃음을 참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바로 그 때, 루이즈도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이야기 말이야,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전에 파우스트와 데르플링거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에 따르면, 시조 브리미르의 사역마는 엘프 여자였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어머나, 그게 정말이야?" "응, 그래." "으음... 만약 그렇다면 난 정말 당혹스러울 것 같아. 난 아직까지 어머니 이외의 다른 엘프들과 만났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엘프와 인간의 혼혈인 나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 그럴까? 뭐, 생각해보면 엘프들도 우리가 성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테니까..." "푸,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 식으로 티파니아와 루이즈가 이 주제를 붙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결국 더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 퀴르케가 마침내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퀴, 퀴르케?" "갑자기 왜 그래?" 티파니아와 루이즈는 어째서 퀴르케가 웃기 시작했는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이러한 두 사람으로 인해 한동안 배를 움켜쥘 정도로 거하게 웃었던 퀴르케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는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하아... 너희들 정말이지... 뭘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지적하려던 건 그런 부분이 아니잖아?" "어, 이것도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애당초 난 엘프가 사역마로 소환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구. 아무튼 정말 너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순진한 아이로구나." "어, 어? 그럼 뭐지?" 티파니아가 다시 퀴르케가 한 말의 의도에 대해서 궁리해보려고 할 때, 루이즈가 퀴르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저기, 퀴르케? 그렇게 노골적으로 비웃기만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아? 만약 정말로 엘프가 티파니아의 사역마로 불려온다면..." "뒷북치지 마, 루이즈.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끝났잖아. 화제가 바뀌면 새로운 화제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대화법이야. 이미 끝난 이야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며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건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안쓰러운 사람들의 행동이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에 그렇게 행동하면 미움당할거야." "하, 하지만..." "그리고 어차피 티파니아의 사역마로 누가 선택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야. 그러니 사역마가 될 누군가에 대해서는 소환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지금부터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해봐야 쓸데없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구." "윽..." 갑자기 정론으로 밀어붙이는 퀴르케에게 압도당한 루이즈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영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보아 루이즈는 아직도 티파니아의 사역마로 엘프가 소환될 가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었고, 쓸데없이 성실할 정도로 진지하게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티파니아 역시 여전히 헛다리를 집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이야... 티파니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루이즈까지 진짜 눈치가 없네. 뭐, 여태껏 티파니아가 헤매면서 아둥바둥거리는 모습은 충분히 즐겼으니까 슬슬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지금부터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되니까 말이야.' 지금까지 티파니아가 어떻게든 생각해보려고 머리를 굴리는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던 퀴르케는 이제 티파니아가 진실을 알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티파니아, 아직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어?" "...미안, 전혀 모르겠어." "루이즈, 너도 아직 모르겠어?" "몰라. 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으음, 정말이지 너희 둘은 어쩜 이렇게나 기적적으로 순진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할 정도야. 뭐, 그럼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네. 그렇긴 하지만... 티파니아, 정말로 말해버려도 괜찮겠어?" "이제와서 그렇게 말하면 궁금해지잖아. 어서 말해줘." "알았어. 그럼 이야기할게."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티파니아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퀴르케는 티파니아가 이제껏 떠올리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이 소환되든 엘프가 소환되든 그건 지금의 시점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누가 소환되었느냐와는 상관없이 넌 그 상대와 계약을 해야 하잖아. 그걸 위해서는 '계약의 의식'을 실행해야 하는데..." "...아!" "그, 그건...!"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루이즈와 티파니아는 퀴르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메이지와 사역마로 소환된 존재와의 계약은 키스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티파니아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와 키스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역마의 소환의 경우에서는 인간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인 엘프가 아니라 환수가 소환되므로 설령 입맞춤을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별 다른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허무의 사용자 티파니아가 소환하게 될 상대는 인간, 혹은 엘프가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사역마와의 계약 의식이 키스라는 것은 루이즈나 티파니아나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특히 이미 두 번이나 사역마를 소환했던 경험이 있는 루이즈로서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루이즈나 티파니아나 대융기의 징조가 발견된 이후 각국에서 성전의 준비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던 바가 컸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루이즈는 최근 들어서 파우스트가 뭔가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거기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거,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 그, 그런데...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나, 난 대체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에 대해서 일종의 로망을 품고 있는 소녀에게 있어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키스를 해야만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기 마련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는 티파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러한 말을 입에 담은 티파니아의 표정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티파니아가 사역마를 소환해야만 한다는 것은 정해진 절차였고,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으으으,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으음..." 졸지에 첫 키스를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상납하게 된 티파니아는 너무나도 불쌍할 정도로 난처해하고 있었고, 루이즈는 여기에 대해서 뭔가 위로를 하려고 했으나 마땅한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티파니아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이야 루이즈는 자신이 사역마로 소환한 파우스트에 대해서 매우 강렬한 애정을 품고 있지만, 처음 소환했을 당시에 그녀는 지금의 티파니아 못지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소환 당시의 파우스트는 지금보다도 더 거칠었고, 외모조차도 흉할 정도로 삐쩍 말랐던데다 이 세계에서 불길을 상징하는 오드아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 때의 기억이 과거에 대한 미화라는 뇌내변환작용을 통해 '아련한 첫 키스의 추억'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루이즈가 티파니아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퀴르케는 조금 더 티파니아를 놀리고 있었다. "뭐, 하지만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야 할까? 어쩌면 티파니아도 루이즈가 그랬듯 자신의 사역마랑 아주 긴밀한 사이가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닐까?" "글쎄,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허무의 사용자와 그 사역마는 대체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어? 지금 여기 있는 반쪽 커플도 그렇고, 지금은 고인이 된 조제프 왕과 그 인형놀이하던 여자도 그랬고, 또 교황 나리랑 줄리오도 그렇고 말이지." "으으으... 그,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곤란한걸... 나, 나도 나름대로 희망하는 만남의 형태라는 게 있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티파니아의 표정은 어두워져갔지만, 문제는 그러한 점은 티파니아가 스스로 감수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결국 여기에 대해서는 콜베르가 교사의 입장에서 나서게 되었다. "흐음... 미스 웨스트우드에게는 애석한 일이다만, 컨택트 서번트 주문은 메이지가 서몬 서번트 주문으로 연 소환 게이트를 통해서 들어온 자에 한해서만 가능하며, 또한 일단 소환 게이트를 통하여 소환된 자가 있는 한 새로 소환 게이트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네. 그렇기에, 새로 소환을 하려면 상대를 죽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겠지. 그러니... 나로서는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 이외에는 할 수가 없겠군." "네..." 결국 콜베르가 티파니아에게 사역마의 소환에 대해서는 그녀 스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콜베르는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정도 전에 재소환을 요청했던 루이즈에게도 이러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임은 분명했다. 한편, 티파니아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즐길 생각이었던 퀴르케는 티파니아가 너무 안쓰러울 정도로 낙담하는 모습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긴 하지만 퀴르케는 그 어조가 다소 짓궂은 형태이기는 했지만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 그것도 앞으로 티파니아가 감수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으므로 딱히 잘못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결국 퀴르케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조금 가벼운 방향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아, 그나저나 사역마 소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교황 나리도 계약을 위해서 자신의 사역마인 줄리오와 키스를 했다는 거겠지?" 정통한 왕조도 아니고 종교적으로 엄격하지도 않은 게르마니아 출신인 퀴르케는 교황을 비꼬는 듯한 칭호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쉽게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의 지적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퀴, 퀴르케! 그게 대체 무슨 불경한 소리야?!" "뭐 어때서? 솔직히 난 교황이라고 해서 딱히 경외심이 드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줄리오를 사역마로 데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키스까지 했다는 거잖아? 그것도 남자들끼리." "으읏..." "아우우..." "...(///)" "..." "어, 어흠." 이 이야기를 들은 루이즈와 티파니아, 그리고 샤를로트를 비롯한 여성진들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했고, 그에 반해서 파우스트와 콜베르로 구성되어있는 남성진은 이 화제에 대해서 굉장히 거북해하면서 애써 외면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주변의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퀴르케는 점점 더 노골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생각해보면 정말 흥미로운 일이지 않아? 아무리 계약을 하기 위해서 키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 치고 교황 나리랑 줄리오는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 보이잖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두 명의 남자들이 이 이야기를 거북하게 생각하듯, 서로를 불쾌하게 여기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말이야." "그, 그런가...?" "그, 글쎄... 그냥 같이 일을 하다보니 가까워지게 된 거 아닐까?" "..."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줄리오나 교황이나 둘 다 멀끔하게 생겼으니까 어느 정도 그림은 나오는 것 같지? 만약 둘 다 외모가 엉망이었다면 진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야." "그, 그건... 그렇긴 하지만..." "으음..." "..." "아무튼, 어째 그 두 사람은 망상의 소재로 삼기에 딱 좋은 것 같지 않아? 이를테면...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도 못하던 남자 두 명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기묘한 인연으로 사로를 만나게 되어 키스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피차간에 당혹스러워했지만, 이윽고 결심한 듯 서로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얼굴을 가까이 하여 입술을 맞댄다. 그리고 그 키스를 통해 서로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침대로..." "...(///)"×3 퀴르케의 '알파벳 두 글자(...)'로 표현해야 할 내용의 이야기에 여성진들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어느 정도 흥미를 가지는 느낌이었다. 이는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가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주제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긴 했지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남자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 그러고보니 오스트란트 호의 엔진 정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군... 이거,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 콜베르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기 거북했는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식당에서 빠져나갔고, 파우스트 역시 그 뒤를 이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지 아는 사람의 알아서는 안 되는 일면을 보고 말았다는 기분과 함께 말이다. . . . 당일 저녁 식사 이후, 파우스트는 자신의 방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낮에 있었던 대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막바지에 펼쳐졌던 소녀들의 망상 대폭주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티파니아가 자신의 저택에 오게 된 이유와 그 경과에 대한 내용에 관한 생각이었다. 참고로 티파니아는 퀴르케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사역마를 소환하는 것에 대해서 다소 망설이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결심을 하는 데에는 며칠 정도의 시간이 더 소요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파우스트가 고심하고 있던 내용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티파니아가 여기로 온 이유는 가능한 한 네 가지 넷을 한데 모아두는 편이 낫다는 여왕의 판단으로 인한 것이었어. 그 네 가지 넷이 모여야 할 이유라는 건... 역시 성전 때문이라는 거잖아. 후우... 정말로 웃기는 일이네. 지금껏 내가 얼마나 성전을 막기 위해서 노력해왔는데,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우울하기 짝이 없어. 거기에다 넬우얼로부터 성전이 세계 멸망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까지 듣게 된 뒤로는 더더욱 골치만 아파오고...' 현재 파우스트의 고민은 최근들어 파우스트가 늘상 빠져있는 고민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앙리에타가 자신의 양해도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티파니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파우스트로 하여금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어버린 성전으로 인해 한없이 휘둘리기만 하는 그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더더욱 침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후우... 이 모든 건 전부 다 대융기라는 현상 때문이야. 그것만 아니었어도 지금의 교황은 갈리아의 왕을 바꿔치기할 정도로 과도한 내정간섭이라는 명목으로 퇴임되었을 공산이 컸었지. 그렇게만 되었다면 성전을 진행하려는 수괴가 권한을 잃고 사라진 셈이니 성전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이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물론 그 일로 인해 교황이 퇴임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파우스트는 그러한 상황을 대비해서 '한 가지 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 계책이라는 것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일종의 도박이기는 했지만, 만약에 성공한다면 교황의 '네 가지 넷'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히 약화시켜 그가 성전을 준비하는 데에 차질을 빚도록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사실 그 계책은 아직도 '실행 단계'에 놓여있었고 더 진척시키는 것도 가능한 상태였지만, 이미 대융기로 인해 성전을 막을 수 없는 지금의 단계에서는 그 계책을 실행한다고 해봐야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파우스트도 이 계책에 대해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솔직히 그 계책을 실행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기는 해. 관점에 따라서는 교황에 대한 일종의 분풀이 같은 거라서 치졸하게 여겨지는 감도 있고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교황이 주도해나가는 이 상황에 수동적으로 이끌려가기만 하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리고 사실 내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변수를 하나 정도라도 더 확보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결국 미리 준비를 해두었던 계책을 시도하기로 결심한 파우스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의 행선지는... 티파니아가 머물 수 있도록 빌려준 방이었다. -------------------------------------------- 지난 화와의 시간적 간격에 비해서 글이 짧은 것은 아이들을 가르쳤던 기간동안 받아뒀던 애니메이션 감상+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대량으로 구매했던 만화&라이트노벨의 탓이 결코 아닙... ...죄송합니다. 거짓말이에요. 상기한 이유가 맞습니다.(...) 뭐, 선생 노릇이 정말 여러모로 고생이 많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오후에는 서울을 향해 출발할 수 있겠네요.
이번에 느꼈던 바에 대해서 간단히 요약하면... 1. 어린애들은 공부하는 걸 정말 안 좋아한다. 2. 노스페이스 유행하는 게 사실이긴 한 모양. 3. 남녀가 모여있을 경우 청소는 남자의 몫이다. 아이들이나, 선생들이나 그렇게 생각한다. 4. 지적질 하는 사람이 정작 지적당할 일을 아주 많이 하면 정말 기분 나쁘다. 그리고 그 상대가 프로그램의 철밥통(?) 포지션이라면 반박도 못 하고 정말 서럽다. ...후우. 뭐, 원래 사회가 이런 거죠. * 제 146화 : 파우스트의 고민과 야간의 방문자.
세계의 수호자 넬우얼은 라스마의 사제인 파우스트에게 이 세계의 탄생과 과거에 있었던 일,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세계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한 이야기는 세계의 탄생과 그 시작을 같이하여 줄곧 세계를 살펴봐왔던 넬우얼이 아니라면 결코 알지 못할 내용들이었고, 그러한 내용들 중 몇몇은 정말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세계의 탄생이 대천사와 악마 군주에 의해 이루어졌고, 인간이 원래는 천사와 악마의 혼종이었다는 사실은 파우스트에게 무척이나 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군데군데 누락된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해야 할 '세계의 위기'의 실체에 대한 내용조차도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여기에 대해서 지적했지만, 정작 넬우얼은 거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봐라.'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파우스트가 이 세계에 소환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이야기를 더 들으면 이야기의 내용을 전부 다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에, 넬우얼이 이야기를 미완성으로 한 채로 사라진 직후의 파우스트는 적잖은 당혹감과 허탈감, 그리고 막막함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감정이 안정된 이후, 파우스트는 넬우얼의 이야기가 그렇게 무턱대고 막막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어지간한 큰 틀에 대해서는 전부 다 이야기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흩어진 이야기를 한데 놓고 생각해보자, 그것 만으로도 대부분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까 전 나는 녀석에게 세계의 멸망의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불평했지만... 그 녀석은 세계의 창조와 파괴는 같은 집단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언급을 했었어. 세계의 파괴는 곧 멸망이니까... 결국 세계 멸망의 위기라는 건 이 세계의 존재가 천상계나 지옥에게 발각될 우려가 있다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거야. 그리고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세계의 존재를 은폐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월드스톤이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넬우얼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앞으로 다가올 세계의 멸망이란 월드스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되었다. 그걸 알았다면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월드스톤이 위험에 처하게 된 원인에 대한 것이었다. 위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았다고 해도, '어떻게'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 역시 넬우얼의 이야기에 힌트가 있었다. '이 세계의 창조주인 파누엘과 오로바스는 월드스톤과 게이트를 지키는 역할을 엘프에게 맡겼다고 했어. 그렇다는 건, 게이트나 월드스톤이나 모두 다 엘프들의 땅인 성지에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적어도 무기들이 성지의 주변에서 발견된다는 줄리오 녀석의 말(하르케기니아 편 111화 참조)에 따르면 게이트는 확실히 성지에 있다는 모양이고, 이는 월드스톤도 마찬가지일 터. 생각해보면 생츄어리에서도 월드스톤을 수호했었던 바바리안들은 월드스톤이 숨겨져 있는 아리앗 산에서 생활했었잖아? 아무튼... 엘프들이 지키고 있는 월드스톤이 위기에 놓였다는 건 누군가가 엘프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크큭, 지금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명백하군.' 적어도 파우스트가 아는 범위 내에서 월드스톤을 수호하고 있는 엘프를 공격하려고 하는 자는 '살아갈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대의명분 하에 엘프와의 '성전'을 주도하고 있는 로말리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성전이라는 행위 자체가 세계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위험을 야기시킨다고 판단해도 타당했다. 물론 전혀 상관없는 이유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넬우얼은 성전 그 자체가 직접적인 미증유의 위기가 아니기는 해도 어느 정도 관련은 있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성전을 월드스톤에 대한 위기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위기 상황은 성전으로 인해 야기된다고 봐야 할거야. 그렇다면... 역시 이 성전을 주도하는 로말리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겠어. 물론 대융기 자체는 사실로 확인이 되었다지만, 정말로 로말리아에게 선의가 있었다면 음모를 꾸미기보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일관되게 경고하는 태도를 취해야만 했어. 하지만 이제까지 로말리아는 그러지도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브리미르가 성지에 건설했다는, 선주의 힘을 없애는 거대 마법 장치라는 엉터리같은 이야기로 다른 이들을 현혹시키려고 들고나 있지. 이건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이 달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세계의 멸망이라는 위험천만한 사태가 성전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성전의 주체인 로말리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들이 해온 일만 생각해도 로말리아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지만, 파우스트에게는 그것 이외에도 로말리아를 의심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넬우얼이 파우스트에게 스스로 실마리를 찾아보라고 하면서 참고가 될 만한 출처에 대한 예시로 들었던, '그 당시부터 존재했던 누군가의 증언'... 즉 데르플링거가 말했던 6천년 전의 일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다. 데르플링거가 파우스트에게 말했던 6천년 전의 일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우선은 브리미르가 간달브의 룬을 부여했던 사역마가 바로 사샤라는 이름의 엘프였고 그 자신은 사샤에게 사용된 검이었다는 이야기었고, 그 다음은 당시에도 엘프가 인간을 '야만인'이라고 무시하기는 했지만 적대시하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인간은 바리야그와, 엘프는 악마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마지막이 바로 로말리아를 건국한 브리미르의 제자, 성 포르사테에 대한 이야기였다. 포르사테는 시조 브리미르의 제자로, 브리미르로부터 그의 세 아들과 함께 넷으로 나누어진 허무의 힘을 같이 전승받게 된 인물이었다. 이 네 명의 인물이 세운 '정통한 왕조'가 바로 트리스테인과 알비온, 갈리아, 그리고 로말리아였는데, 이 중 포르사테가 세운 나라가 바로 로말리아였다. 네 개의 정통한 왕조 중 로말리아가 '황국'이라 불리우게 된 것은 로말리아를 건국한 포르사테가 생전의 브리미르 어록과 행적을 정리하여 경전을 만들고, 그를 신으로 받드는 브리미르 교를 창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리미르와 그를 신으로 모시는 브리미르 교, 그리고 포르사테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비유하자면 마치 알라를 신으로 모시는 이슬람교와 그 창시자인 무함마드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과 같이 받들어 모시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존경할 만한 성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르플링거는 이상할 정도로 포르사테와 그가 건국한 로말리아에 대해서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하르케기나아 편 109화 참조.)을 보였어. 그 이유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데르플링거에게는 포르사테를 수상하게 여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거기에다, 데르플링거는 브리미르가 신으로 숭배받고 있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의 이야기도 했었어... 브리미르 교를 창시한 사람도 역시 포르사테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수상하군. 틀림없이 6천년 전에 뭔가가 있었던 거야.' 데르플링거가 이상할 정도로 불쾌감을 표출했고, 또한 현재의 세계의 위기를 초례할 성전을 주도하고 있는 브리미르 교의 창시자라는 점에서, 파우스트는 포르사테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6천년 전의 일에 대해서 파우스트가 아는 것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브리미르가 신으로 추앙받는 지금의 시점에서 당시의 일은 문자 그대로 '신화 시대의 일'이나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파우스트는 6천년 전의 일에 대해서 꿈이나 데르플링거에게 들은 단편적인 사실, 그리고 넬우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추론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포르사테에 대해서는 더 이상 파고들 방도가 없어. 그가 이미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어버린 이상, 그 자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 으음, 그 밖에 내가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부분은... 과거에 있었다는 세계의 위기에 대해서인가? 뭐, 그래도 시그나르가 브리미르의 힘을 어떻게 이용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짐작할 수 있겠어. 브리미르가 사용했던 허무의 마법은 여러 가지 능력이 있었겠지만... 넬우얼 녀석이 특별히 강조했던 것이 있었잖아?' 넬우얼은 브리미르를 가리켜 '마법으로 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마법사'라고 했었다. 허무의 마법은 여러 가지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넬우얼이 그러한 능력을 강조했다는 것은, 당연히 시그나르가 브리미르의 그 능력에 관심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시그나르가 브리미르의 그 힘을 어디에 이용하려고 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기는 해. 넬우얼의 말에 따르면 시그나르 본인과 그의 부하 악마들은 엘프들에 의해 전멸당했으니... 아무래도 시그나르는 브리미르의 힘을 이용해서 지옥과 이 세계를 연결시켜 증원을 부르려고 했을지도 모르겠군.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면 이 세계는 지옥에 정체가 발각되었을테니... 그래, 아마도 그게 6천년 전에 있었다는 세계 멸망의 위기였을거야.' 파우스트는 넬우얼에게 들었던 내용과 지금껏 그가 알고 있던 사실을 적절히 활용하여 이 정도까지는 추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 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내용들도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우선은 포르사테, 그 자에 대해서 알아야 브리미르 교와 로말리아가 어째서 이토록 성전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알 수 있어. 하지만... 그 자에 대한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데르플링거는 이미 없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어째서 인간과 엘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느냐야. 엘프는 브리미르를 악마로, 허무의 힘을 악마의 힘으로 부르며 인간과 적대하고 있지만... 정작 브리미르는 시그나르에게 이용당하지 않았잖아? 만약 시그나르가 브리미르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 세계는 진작에 지옥과 연결되어 멸망하고 말았을 테니까 말이야.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면... 상황이 조금은 더 호전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상당한 실마리를 품고있을 포르사테에 관해서, 그리고 인간과 엘프가 적대시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아질 가능성은 있었다. 물론 인간과 엘프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반목해왔고, 각국의 성전 참여 또한 브리미르 교에 대한 맹신 때문이 아니라 대융기로 인해 살아갈 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근본적인 공포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파우스트도 까마득한 과거의 일을 알아냈다고 해서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은 무리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한 정황을 알아야 뭔가 행동을 할 여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포르사테의 건과는 달리 인간과 엘프가 적대시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파우스트가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 데르플링거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후자의 경우는 넬우얼이 이미 방법을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넬우얼은 파우스트에게 그 스스로 상황을 파악해보라고 하면서 참고해 볼 만한 것으로 예시를 든 것 중 하나가 바로 과거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승이었다. 그리고는 걸러들어야 할 점도 있겠지만 '대조'를 통해 알아보라고도 했었다. '전승을 서로 대조해보라고? 후우... 무언가를 대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둘 이상의 대상이 존재해야 하는 법이잖아. 그래,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인간의 전승과... 엘프의 전승을 말하는 거겠지?' 넬우얼은 과거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승을 예시로 들면서 이를 '대조'해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대조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파우스트가 과거의 일에 대한 엘프의 전승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컨데, 넬우얼은 파우스트에게 '엘프를 찾아가봐라.'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래서, 넬우얼은 나보고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엘프의 전승을 알아보기 위해서 엘프의 땅으로 찾아가기라도 하라는 거야? 오래 전부터 인간과 적대시하고 있는 엘프의 땅에... 그것도 이제 곧 성전이라는 이름의 침략전쟁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이 악마로 여기고 있는 허무의 사역마인 내가...? 크큭, 이건 완전히 미친 짓이잖아.' ...이건 깊이 생각할 필요조차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위험한 이야기였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땅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엘프들이 모를리도 없었고, 거기에 파우스트는 그들이 악마라고 허무의 사용자의 사역마였다. 뿐만 아니라 엘프 중에서도 상당히 고위직의 역할을 수행하는 비다샤르와도 싸운 적이 있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엘프들이 자신을 환영해주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거기에다 모든 엘프들이 자신들의 과거 역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거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한 이를 찾기까지 해야 한다는 점도 난점이었다. '이것 참... 자신들의 과거 역사에 대해서 잘 아는 엘프를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더 이상의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엘프를 찾아가봐야 그들의 협력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잖아? 빌어먹을... 그럼 대체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잖아?' 결국, 파우스트로서는 뭔가를 하려고 해도 마땅히 할 방도가 없게 되었다. 어차피 성전은 대융기의 공포로 인해 각국에서 자발적으로 참가하게 된 만큼 파우스트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파우스트로서는 넬우얼에게 들은 과거의 일의 진상에 대해서라도 밝혀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넬우얼이 굳이 과거의 일에 관련된 부분 위주로 힌트를 줬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에서 뭔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러한 생각 자체가 너무 낙관적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며 그것 이상으로 엘프의 본거지에 찾아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러다보니, 파우스트는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한동안 혼자서 깊은 고심에 빠져야만 했다. . . . 원래대로라면 파우스트와 루이즈, 두 사람만이 거주하고 있었어야 할 해골들의 저택이었지만, 로말리아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여러 사람들이 저택 내부의 빈 방을 얻어쓰게 되었다. 우선은 갈리아 왕위를 가짜 샤를로트 여왕에게 넘겨줌으로써 공식적인 직위를 모두 포기한 샤를로트와 실피드가 저택의 빈 방에 입주했고, '지하수'를 소지하고 있는 '갈리아' 출신의 북화단 기사단 단원 '엘자 드 알비(Elsa de Albi)'가 샤를로트를 따라 해골들의 저택에 자리를 마련했다. 그 다음으로는 오스트란트 호의 개조를 위해 학원 업무를 무기한 면제받은 콜베르가 저택을 찾아왔고, 퀴르케 역시 콜베르의 일을 도와주면서 샤를로트와 같이 지내기 위해 집의 빈 방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저택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죄다 귀족급의 인물들로 늘어나자 파우스트는 식사 준비를 위한 주방장을 한 명 고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당연히 파우스트가 소비해야하는 지출액은 천정부지로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주방장을 고용하는 데에도 돈이 들었지만 요리를 만들기 위한 식재료의 구입에도 당연히 돈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큰 금액이 사용된 부분은 바로 가구였다. 저택의 보수 공사는 진작에 끝났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택 그 자체의 수리에 불과했다. 지나치게 낡은 저택 내부의 가구들 중 쓸만한 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이들을 모두 폐기시켰고, 그 다음에 자신과 루이즈가 사용할 가구만 구입했기 때문에 저택 내부의 '빈 방'은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의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문자대로의 빈 방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이들을 위해서 막대한 양의 돈을 들여 가구를 새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사용된 금액은 드 오르니에르의 1년치 생산량(1천 에큐)의 5배 이상에 해당했다. 파우스트가 트리스테인 정부로부터 받는 1년치 연금이 3천 에큐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연금과 드 오르니에르 지역의 1년치 생산량을 모두 합한다 해도 이미 적자였다. 거기에 식비 및 주방장 고용 비용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소모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아무래도 올해는 돈을 까먹기만 하는 해가 될 것 같았다. "쳇... 생각해보면 다들 돈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내가 방 뿐만이 아니라 식사와 각종 설비에 이르기까지... 그 녀석들을 위한 비용을 죄다 부담해야 하지? 그냥 녀석들에게 집세라도 받아낼까?" 저녁 식사도 마친 밤중에, 파우스트는 현관 앞의 중앙 홀에 배치되어있는 소파에 무기력한 자세로 몸을 완전히 묻은 채 한동안 가만히 있던 상태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있지 않았다면 그냥 자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이러한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던 것이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파우스트를 바라보고 있던 루이즈는 그 말을 듣고는 약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라? 파우스트, 혹시 지금 돈이 많이 궁한 상태야?" "으엇?!" 멍하게 생각에 잠긴 탓에 영혼의 기척에 대한 감각도 둔화되어 있었던 파우스트는 루이즈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늘 그랬듯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않아. 나의 정기적인 수입인 연금과 드 오르니에르의 생산량만 가지고 비교해보면 확실하게 적자지만, 지난 번 결투에서 100만 에큐 가량을 벌어뒀으니까 잔액은 엄청나게 많지." "그래, 그렇다면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흥,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턱대고 적자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잖아? 정말이지, 저 녀석들이 돈이 없어서 내가 재정지원을 하는 거라면 또 모를 일이지만, 이 경우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라고. 이건 그냥 저 녀석들이 마음대로 남의 집에 들어온 거지, 난 녀석들이 없어도 전혀 아쉬울 것 하나 없는데 왜 조공까지 해가며 받들어 모셔야 하냐, 이거라고. 아, 그래... 이쯤되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가 되는 거잖아? 흐음, 아무래도 역시 녀석들에게 어느 정도는 금액을 청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습게 여기고서 나를 무슨 물주처럼 취급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지." "..." 파우스트는 공연히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리기를 반복했지만, 그러한 파우스트의 모습을 바라보는 루이즈는 의외로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한 루이즈의 얼굴을 확인한 파우스트는 조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루이즈에게 따지고 들었다. "야, 사람을 동정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불쾌한 표정은 대체 뭐야?" 파우스트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루이즈에게 물었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것은 파우스트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어린 질문이었다. "저기, 파우스트. 너무 고민할 건 없지 않을까?" "...뭐? 이제와서 고민은 무슨. 이건 이미 확정사항이야. 아, 그래도 너한테까지 비용을 청구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은 말라고." 하지만 파우스트가 대답한 것과는 달리, 루이즈가 언급한 '고민'은 파우스트가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난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뭐라고? 그럼 뭔데?" "그러니까, 난 네가 '대융기'와 그로 인해 가속화된 '성전'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거야." "...뭐?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지금 이야기의 맥락에서 성전에 대한 내용이 나올 수가 있는지 정말로 신기할 정도로군. 하긴 뭐, 네가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게 어디 한 두 번 있던 일이겠냐만은." 루이즈의 말에 파우스트는 일순간 뜨끔하기는 했지만, 이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루이즈는 여전히 안쓰러움이 깃든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내가 딱히 이상한 말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어째서지?" "그야... 솔직히 이상하잖아? 파우스트 넌 지금까지 성전을 막기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해왔는데, 그랬던 네가 성전이 기정 사실화된 이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돈을 걷을 궁리나 하고 있다는 건...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아. 너무 부자연스러운걸." "..." 엄연한 사실을 지적하는 루이즈의 말에 파우스트는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정곡을 찔렸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을 하는 것 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버린 파우스트를 바라보던 루이즈는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를 고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으음, 이런 말을 하면 조금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아. 네가 이 상황에서 공연히 수금 이야기를 꺼내며 투덜거리는 건... 왠지 지난 번에 '원소의 형제'와 만나기 직전과도 같은 상황인 것 같아. 그 때 파우스트 넌 성하가 무슨 음모를 꾸밀 것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지나치게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식으로 불안감에서 벗어나려고 했었잖아?" "...!" 그 때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파우스트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파우스트에게 있어서 그 일은 연쇄적으로 닥쳐왔던 괴로움이 자괴감으로까지 악화되었던 상황이었다. 뭐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는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데르플링거가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그간 금기시해왔던 복수까지 결심하다 끝내는 라스마의 사제로서의 신념까지 집어던져버렸던, 파우스트로서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인생 최악의 순간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 루이즈가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으니 파우스트로서는 다소 불편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루이즈에게 화를 내지는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어차피 당시 상황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잘못한 것일 뿐이었고, 거기에다 루이즈는 이러한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조심스러워했으며 또한 처음부터 파우스트의 기분이 나빠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다는 건 루이즈로서도 상당히 진지하게 각오를 하고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이를 방해하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이즈도 파우스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의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만을 거듭할 뿐만이 아니라 죄책감까지 느끼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이 세상에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가능한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있잖아? 도저히 어떻게 할 수단이 없다면... 거기에 얽메이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을 한없이 괴롭히기만 할 뿐이야. 이번 성전 역시 그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성전은 네가 노력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네가 성전을 막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네 책임이나 잘못이라는 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러니까... 난 네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물론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우선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보지 않겠어? 성전은 막을 수 없다고 해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할 여지는 있을 테니 말이야." "..." 루이즈의 말은 어디까지나 답이 없어보이는 상황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을 파우스트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일종의 충고였고, 이러한 사실은 파우스트 역시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최근에 루이즈로부터 직접적으로 고백까지 받은 이후부터 파우스트는 이렇게 루이즈가 자신에 대해서 호감을 드러내거나 신경써주는 상황에 대해서 이전보다도 더 동요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기도 했고, 거기에다 '루이즈가 자신에게 충고를 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최근까지 충고를 하는 쪽은 파우스트에 듣는 쪽은 루이즈로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의 파우스트로서는 루이즈의 말에 순수하게 감상적인 기분에 잠길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으음... 루이즈 녀석의 입장을 고려하면 이 말 자체는 합리적이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루이즈 녀석이 지금 상황의 진짜 위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라고. 루이즈야 뭐, 성전의 위험성에 대해서 기껏해야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거니까 비교적 침착할 수 있는 거겠지만... 그 실상은 더 심각한 거잖아? 이대로 성전이 벌어지게 내버려두다가는 이 세계의 존재가 천상계나 지옥에게 알려지게 될 거라고!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성전이 우습게 보일 상황이 벌어지겠지!' 사실 루이즈가 자신을 신경써서 충고를 해줬다는 건 파우스트의 입장에서도 제법 고마운 일이었고, 또 그녀가 말한 내용 역시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올바른 내용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현 상황에 대해서 '루이즈가 파악하고 있는 내용'과 '파우스트가 알고 있는 내용'이 무척이나 달랐다는 점이었다. 루이즈는 성전이 세계의 멸망과 이어질 수도 있는, 그녀의 사고를 아득히 초월하는 위험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파우스트처럼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지 않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파우스트는 루이즈에게 이러한 내막에 대해서 도저히 설명할래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는 루이즈가 천상계 및 지옥의 존재 및 세계의 형성 단계에까지 거슬러가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루이즈 녀석이 아둔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야. 아마도... 루이즈 녀석은 내가 하는 이야기라면 온전하게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납득하려고 들겠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즉 성지에 찾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야!' 파우스트가 여기에 대해서 루이즈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실행하지 못한 채 계속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루이즈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물론 그 일 자체가 터무니없이 위험한 것이기에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루이즈에게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서 쩔쩔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 보다도 더 큰 이유는... 바로 루이즈가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자신과 함께 같이 가자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지금까지 이 녀석이 해왔던 대책없는 짓거리만 생각해봐도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지. 원래부터 루이즈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걸 수 있는 녀석이었어. 그래서 나로 하여금 무척이나 귀찮은 뒷감당을 하게 만들었고 말이야. 그런데 최근 들어서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멋대로 나까지 집어넣고는 멋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최근 루이즈가 파우스트를 위해서 스스로 판단한 끝에 저지른 '멋대로 한 행동'에는 파우스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기 위해 '성녀'로써 모든 권리와 기억까지도 버렸던 일과, 파우스트와 앙리에타의 사이를 멋대로 오해하고는 자기가 사라지는 쪽을 택하고서 성 마르가리타 수도원으로 가버린 일이 있었다. 루이즈가 한 이 두 가지 일은 파우스트에게 있어 치명적일 정도의 괴로움과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 계기 자체는 파우스트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이상의 일들로 인해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는 치가 떨릴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루이즈의 행동은 100%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널려있는 행위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생아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한데다 혐오의 대상인 네크로맨시를 익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삶을 살아왔던 파우스트에게 있어 자신을 이 정도로 사랑해주는 상대를 외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것이 애증이라는 건가? 아니, 물론 내 경우에는 애(愛)라고 하기는 어려우니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표현하자면 그나마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파우스트는 자신의 루이즈에 대한 감정을 명확하게 정의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루이즈가 자신을 좋아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솔직히 기쁘다고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루이즈에게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성지로 엘프를 찾아가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알아본다는 것은 그 자신도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라 주저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러한 일에 루이즈까지 말려들어 그녀의 생명에 위험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파우스트로 하여금 그러한 상황을 싫다고 받아들이는 이유가 되는 감정에는 온갖 종류의 것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명확했던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루이즈의 신상에 위험한 일이 일어나는 것 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파우스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자코 있기만 했는데,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긴 루이즈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파우스트?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거야? 혹시 내가 한 말이 뭔가 이상했어?" 아무래도 루이즈는 파우스트가 자신이 한 말을 듣고도 여전히 갈등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는 점을 이상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실제로 루이즈가 한 말은 지금 상황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해서라면 상당히 조리있고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기에, 루이즈도 당연히 파우스트가 자신의 말을 듣고 조금은 마음이 풀리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파우스트가 굳은 표정으로 번민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기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것이었다. "...아니." 그 말을 들은 파우스트는 조금 늦게나마 아니라고 대답했다. 루이즈에게 세계의 위기의 정체에 대한 내용을 숨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루이즈의 말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갈등하던 파우스트의 반응은 약간 늦었고, 이러한 파우스트의 태도로 인해 루이즈는 뭔가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파우스트. 혹시... 내게 말하기가 조금 곤란한 부분이라도 있는거야?" "...!" 파우스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루이즈는 여기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하지만 날카롭게 추궁하는 태도가 아니라,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달래듯 토닥거리는 온건한 태도였다. 차라리 루이즈가 신경질적으로 힐난하는 식으로 나왔다면 그러한 태도에 익숙한 파우스트는 비교적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루이즈가 부드러운 태도로 나오자 파우스트는 더더욱 쩔쩔매고 말았다. '이런... 루이즈 녀석, 왜 이렇게 눈치가 좋아졌지? 아니면 내가 너무 흐물흐물해진건가? 일단은 둘 다인것 같기는 하지만, 이렇게 의심만 증폭되는 상황이라면 곤란해지는데...' 최근 들어서 스스로가 점점 더 루이즈에게 휘둘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파우스트이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무척이나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이라면 루이즈가 어떤 식으로 추궁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허세를 부리며 대응했겠지만, 지금은 초기 대응부터 실수를 한 데다 연이어서 표정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에 더더욱 상황이 난감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저택의 안마당으로부터 육중한 무언가가 안착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저택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미리 연락이 온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 갑작스러운 방문자의 등장은 저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뭐야? 누가 온 거야?" "혹시 침입자인가?" 이들 중 퀴르케와 콜베르는 아예 파우스트와 루이즈가 있는 현관의 중앙 홀에까지 내려온 다음, 앞마당 방향으로 뚤린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하긴 했지만 마당에 내려앉은 물체의 곳곳에서 빛이 발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건... 용가마잖아?" "흐음, 그렇다면 상대는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자라는 말인데... 왜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 밤중에 갑자기 왔단 말인가?" "글쎄요.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용가마의 존재를 확인한 퀴르케와 콜베르는 상대의 정체와 그 목적에 대해서 의아해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 옆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루이즈와 파우스트는 둘 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파악했다. 루이즈는 익숙한 용가마의 모양을 보고는 거기에 탑승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고, 파우스트는 용가마에 타고있는 사람들 중 익숙한 영혼의 기척을 감지하는 식으로 상대를 인식했던 것이다. "서, 설마...! 하, 하, 하지만! 어, 어, 어, 어째서...? 어째서 여기에 찾아오신 거야?!"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루이즈는 그 표정이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왔다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서 파우스트는 조금씩 표정에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루이즈가 상대의 방문으로 인해 위축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압박감이 줄었던 것이다. '흐음, 저 여자가 왜 이런 시점에서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군.' 그러는 사이에, 용가마의 기수 옆에 앉아있던 시종이 내리더니 여기까지 모시고 온 분을 위해 가마의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나온 사람은 루이즈의 큰언니인 엘레오노르였다. 그녀는 가마 밖으로 나오자마자 귀족의 여식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큰 걸음걸이로 저택의 현관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한 엘레오노르의 태도에 동행한 하인들도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었지만, 직접적으로 그녀를 제재하기 위해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트리스테인의 왕립 연구기관인 아카데미에 소속된 엘레오노르는 그녀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前 아카데미 평의회 의장 공드랭 경(현재는 파우스트의 암살을 사주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前이 붙은 이유.)에게도 막 밀어붙일 정도로 성정(性情)이 불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택의 현관문 앞에까지 당도한 엘레오노르는 팔짱을 낀 자세로 문이 열리기를 잠시 기다리는 듯 하더니, 결국 더는 기다리지 못한 모양인지 스스로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처음부터 현관문이 잠겨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열렸고, 열린 문을 통해 현관의 바로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것을 확인한 엘레오노르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뭐야, 이 저택은 손님이 왔는데 아무도 마중나오지 않고 직접 들어오게 만드는 거야? 그것도 내가 오는 걸 다 보고 있었으면서 무시하기까지 하면서 말이지?" 과격한 등장에 이어 고성까지 지르는 엘레오노르의 출현에 퀴르케와 콜베르는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고, 루이즈는 이미 엘레오노르의 용가마를 봤을 때부터 벌벌 떨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이러다보니 결국 파우스트가 엘레오노르를 맞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야말로 여기에 올거면 사전에 연락이라도 했어야지. 왜 이런 밤중에 몰래 찾아오고 그러는 거지? 아니면 뭐야, 혹시 나를 암살하러 오기라도 한 거야?" "암살이라니! 또 내게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다시 그 따위 억지스러운 소리를 해?" "억지라니. 실제로 지난 번에 당신은 나를 죽일 정도로 목을 조르지 않았던가? 난 정말로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고." "그건 네녀석이 하도 안 일어나니까 성질이 났던 거지!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잖아!" "그렇다고 해서 숨이 끊어질 정도로 사람 목을 조르는 게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한 가지 더. 나의 암살을 의뢰했던 건 아카데미 평의회 회장인 공드랭 경... 그러니까 당신 상관이었다고. 어디 한 번 내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지 않겠어? 내 목을 죽일듯이 졸랐던 자의 상관이 나를 암살하려 했다면, 당신 또한 그와 한통속이라고 판단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잖아?" "그, 그건... 나도 듣고 놀라긴 했지만 말이야. 설마 그런 얼간이에게 그 정도의 짓을 결행할 배짱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아, 아무튼! 나를 그런 작자랑 한통속으로 엮으려 들지 마! 그런 얼간이와 비교당한다는 건 나와 라 발리에르 가에 대한 크나큰 모독이니까!" "그래서, 당신이 이곳으로 온 목적은 뭐지?" "..." 원소의 형제에게 자신의 암살을 의뢰했던 공드랭 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무작정 화만 내던 엘레오노르도 일순간 우물쭈물하는 느낌이었으나, 이내 다시금 평소의 기세를 되찾았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금새 화제를 바꾸는 것으로 엘레오노르를 김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엘레오노르의 침묵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드세기만 했던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 난처한 기색이 감지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알아차린 파우스트는 조금씩 엘레오노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여기까지 부랴부랴 온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그것도 사전에 연락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황급히 행동한 이유가 말이야." "화, 황급히라니... 무슨 소리야? 애당초 내가 여기에 오는데 연락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거지?"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는 사전에 연락을 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이자 상식이 아닐까? 설마 고명하신 라 발리에르 가의 자녀분께서 그런 점도 지키지 않았다는 건가?" "그, 그렇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꼬맹이 루이즈가 사는 집이잖아? 언제 오는지는 내 마음이지." "루이즈가 여기에서 사는 건 맞지만 여기는 내 집이야.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억지부리지 말고 여기에 왜 찾아왔는지 이유나 말해보라시니까?" "..." 파우스트는 엘레오노르의 핑계를 하나씩 반박하면서 점점 더 압박감을 주기 시작했고, 결국 엘레오노르는 조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도 당분간 여기에서 살기로 했어." "안 돼." "뭣이라고!" 파우스트가 단칼에 거절하자 엘레오노르는 다시금 노성을 질렀다. "대체 어째서 안 된다는 거야?" "될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어차피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잖아! 그 마당에 나 하나 정도 더 들어가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래? 방이 모자란 것도 아닐텐데?" "방이야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이야. 당신이 사용할 가구 같은 건 없거든. 안 그래도 다른 녀석들에게도 가구값이나 받아낼까 생각중인데 말이지.(이 부분에서 퀴르케와 콜베르가 흠칫했다.) 그리고 애당초 당신은 아카데미 소속의 연구원일텐데. 여기서 아카데미까지 출근할 생각이야?" "흥, 가구같은 건 내 기숙사에서 죄다 쓸어왔으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용가마까지 가져 왔으니까 출퇴근에도 전혀 지장은 없다고!" "뭐...라고?" "그리고 용 먹이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은 접어두시지. 당신같은 사람에게 손을 벌리는 건 내 입장에서도 굴욕이라 견딜 수 없거든!" "...방을 내놔라는 시점에서 이미 손을 벌리는 거 아닌가?" "그, 그러니까 내쪽에서 최대한 부담하겠다는 거잖아? 뭔가 불만이라도 있어?" "..." 가구까지 모조리 챙겨왔다는 엘레오노르의 말은 파우스트에게도 상당히 의외였다. 설마 엘레오노르가 이 정도로나 본격적으로 자신의 집에 살림을 차릴 생각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거 참... 가구까지 모조리 챙겨왔다고?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로군. 그나저나,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떠맡기는 것 조차도 싫어할 정도로 자존심이 드센 이 여자가 왜 이렇게까지나 필사적으로 내 집에서 살려고 하는 거지? 이거, 아무래도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파헤쳐보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어.' 파우스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절박하다고 표현해야 할 엘레오노르의 이 행동에는 뭔가 원인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물론 그 원인이라는 것이 엘레오노르에게 있어서 약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구석도 있었기에, 파우스트는 여기에 대해서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그나저나... 어지간히 의외라면 의외로군. 대체 왜 이렇게나 이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마치 내 집에 들어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으로 인해 '두려움'까지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지." "그, 그게 무슨 말이지? 두, 두렵다니? 내가 왜?" 파우스트는 엘레오노르로부터 '공포'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떠본 것이었고, 이에 엘로오노르는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전혀 그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한 엘레오노르의 반응을 확인한 파우스트의 표정은 다소 가학적으로 변했다. "흐흠... 역시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아카데미 연구원들의 기숙사에서 잠도 자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뭐, 뭐야? 감히 나를 혼자서는 잠도 못 자는 어린 아이로 취급하기야?" "난 딱히 당신을 어린 아이로 취급한 적 없는데? 그보다 대체 당신을 어떻게 하면 어린 아이로 생각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자기 덩치나 보고 말하시지." "더, 덩치? 어떻게 그런 표현을 레이디에게 쓸 수 있어? 그리고 난 딱히 체구가 큰 것도 아니라고!" "그딴 건 아무래도 좋고, 그래서 뭐가 무서운 거야? 시기를 생각해보면... 왠지 '대융기'랑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당신도 아카데미의 연구원이니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 파우스트의 입에서 대융기가 언급되자, 엘레오노르의 표정은 이제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가면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파우스트는 비웃음을 지으며 엘레오노르를 조롱했다. "크크큭, 뭐야. 설마 진짜로 대융기 때문에 무서워서 잠도 못 자겠다는 거야? 이야아... 물론 대융기가 범 세계적인 재앙이라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써부터 이런 식으로 겁부터 집어먹고 있다니.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당신이 늘 꼬맹이라고 부르는 루이즈 녀석도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지." "으으으... 시끄러웟!" 파우스트의 정확한 지적에 당혹스러운 나머지 수치심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얼마간 말도 못하고 있었던 엘레오노르는 결국 더는 견디지 못하고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어, 어쩔 수 없잖아! 기숙사에서 불과 2km 가량 떨어진 산의 표층에서 대량의 풍석이 증식되고 있다는 증거물이 발견되었는걸! 코앞에서 폭탄이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냔 말이야!" 자신이 대융기라는 현상 그 자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다는 취급을 받는 것이 무척이나 굴욕적이었던 모양인지, 결국 엘레오노르는 숨기고 있던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말았다. 물론 자신이 파우스트의 집으로 이사하려 했던 이유가 대융기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미 파악이 된 이후였으니,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사실에 대해서 순순히 이야기를 하는 편이 최소한의 본전치기라도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숨기고 있던 것이 타의에 의해 들켜버린 시점에서 뭘 한다고 한들 그것은 부질없을 뿐이었고, 결국 엘레오노르의 극도에 달한 굴욕감과 수치심은 분노라는 명확한 감정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아아, 정말!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람! 아, 제기랄... 이젠 나도 몰라! 이렇게 된 이상 네 허락 따위는 필요없어! 그냥 내 마음대로 여기에 살림을 차릴 테니까 잠자코 있어!" "으음... 뭐, 나도 악마는 아니니까..." 엘레오노르가 분노로 인해 완전히 막나가기 시작하자, 이제는 파우스트도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원래 파우스트는 가학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고, 거기에다 엘레오노르에게 대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질 정도의 흥미나 악감정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계속 괴롭히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엘레오노르의 성향 또한 괴롭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학적인 즐거움을 느끼기 어렵게 만들었다. 만약 상대가 루이즈였다면 어떻게든 반박하려고 애쓰다가 할 말이 떨어진 뒤로는 분한듯 뺨을 부풀리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며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으로부터 귀엽다거나 놀려먹는 재미가 있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엘레오노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화만 낸다면 그다지 재미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난 딱히 루이즈를 놀렸을 때 녀석이 보였던 반응이 귀엽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고.' 파우스트는 엘레오노르의 반응을 그녀의 자매이며 그가 가장 많이 놀렸던 루이즈의 반응과 무심코 비교하다가 일순간 떠오른 생각을 애써 무시하고는, 이번 대화의 마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일단 빈 방이야 있으니까 당신이 내 집에 입주하는 것 자체는 말리지 않겠어. 다만, 스스로가 소모하는 물품에 대한 비용 정도는 알아서 하라고." "알았으니까! 얼른 내가 쓸 방으로 안내해! 당장 내 짐을 풀어놓을 테니까!" 하지만 파우스트는 손을 들어올려 엘레오노르의 행동을 막는 제스처를 취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벌써 꽤 밤이라고. 짐을 대체 얼마나 잔뜩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밤중에 그것들을 옮기는 소음을 듣고 싶지는 않아." "그, 그럼 나보고 어디서 자라는 거지?" "루이즈 녀석의 방에서 자. 자매잖아." "히엑?!" 파우스트는 엘레오노르에게 루이즈와 같이 자라는 말을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투로 중얼거렸지만, 막상 루이즈는 파우스트의 이 말에 흠칫했다. 최근 라 발리에르 저택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루이즈의 엘레오노르에 대한 감정이 많이 풀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엘레오노르에 대해서는 그녀로부터 괴롭힘 당하기만 했던 두려운 기억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이즈의 유년 시절의 기억의 대부분이 '어머니 혹은 엘레오노르에게 꾸지람을 듣고 카틀레아에게 위로받는 상황'이었음을 상기해보면 엘레오노르와 같이 잔다는 상황이 더더욱 어색하고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엘레오노르는 전혀 뜻밖의 소리를 꺼냈다. "응? 뭐야, 너희들 같은 방 쓰는 거 아니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지?" 예상치도 못한 의문을 담는 엘레오노르에게 파우스트는 일순간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물론 파우스트는 이 저택에서 루이즈와 따로 방을 쓰고 있으니 찔릴 구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엘레오노르가 자신과 루이즈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난처했던 것이다. 어쨌든 감정을 추스리는데 성공한 파우스트는 엘레오노르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고, 그러한 파우스트의 반응에 대해서 엘레오노르는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듯 질문했다. "아니, 대체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는 듯한 그 눈빛은 뭐야?" "뭐긴 뭐겠어? 실제로 이상한 소리를 했으니까지." "그게 무슨 소리야?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는 같은 방 썼었다며?" "그야 뭐, 학원에서는 따로 방을 구할 수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일 뿐이다만." "..." 파우스트의 대답에 엘레오노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금 파우스트에게 물었다. "그, 그렇지만... 너희들, 연인 관계인 거 아니었어? 왜 저택까지 마련된 상태에서 방을 따로 쓴다는 거야?" 엘레오노르가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파우스트와 루이즈가 같은 방을 사용한다는 상황을 용인하기 때문은 결단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루이즈와 파우스트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과 실제가 크게 괴리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는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파우스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연인? 크크큭... 그거 농담이지? 난 그저 '우연'히... 루이즈 녀석에게 사역마로 소환되었을 뿐인 인간이고, 그렇기에 이 녀석이랑 나와의 관계도 메이지와 사역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파우스트는 그가 언제나 루이즈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상대에게 대답하는 말을 읊었다. 다만 이번에는 '우연'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약간 머뭇거렸는데, 이는 며칠 전 넬우얼과의 대화에서 그가 파우스트가 이 세계로 소환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했던 부분이 떠올랐던 것이다. '흥... 내가 루이즈 녀석에게 소환된 건 우연일 뿐이야. 거기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치부할 생각까지는 없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터무니없이 거창한 이유로 소환되었다니... 그게 말이나 될 소리야? 난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고. 지옥의 3대 군주를 쓰러뜨렸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뿐이지. 넬우얼 녀석, 쓸데없는 소리로 내게 부담감이나 지우고 말이야.' 한편, 그러한 파우스트의 대답을 들은 엘레오노르는 굳은 표정으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파우스트와 루이즈를 번갈아가며 매섭게 노려보다가 결국 루이즈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다가섰다. "꼬맹이 루이즈! 너, 오늘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네에엣-?! 왜요?" "잔말 말고 어서 움직여!" 두려움에 떠는 루이즈의 바로 앞에까지 빠르게 다가간 엘레오노르는 여느 때처럼 루이즈의 볼을 잡고서 거세게 끌어당겼다. "아아아~! 아하요!(아파요!) 아흐아오요!(아프다고요!)" "시끄럽긴! 얼른 네 방으로 안내하지 못하겠어?" "이, 이허 호코 이야이하요!(이, 이거 놓고 이야기해요!)" 루이즈는 엘레오노르에게 뺨을 잡혀 끌려다니는 상태로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루이즈의 방을 모르는 엘레오노르가 그녀를 자기 마음대로의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는 점이었고, 루이즈는 자신의 방 위치를 설명하려 해도 뺨을 잡힌 상황에서는 제대로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간신히 엘레오노르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는데 성공한 루이즈는 눈물을 글썽거리고서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어루만지며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엘레오노르로부터 추궁을 받아야만 했다. "야, 꼬맹이 루이즈!" "왜, 왜 그러시나요?"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해서 솔직히 말해! 알겠어?" "아, 네! 알겠어요!" 엘레오노르의 기세에 완전히 눌린 루이즈는 순종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에 엘레오노르는 본격적인 추궁에 들어갔다. "너, 저 시건방지고 허여멀건한 월목(月目 : 오드아이)이랑... '했어'?" "네? 하다니... 뭘요?" "아, 아니... 그러니까... 그 뭐시냐, 뭔가 '모종의 일'이라도 있었냐고?" "모종의 일...?" "으윽! 그, 그게 그러니까... 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아으으으..." 해당 표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가 민망했던 엘레오노르는 약간 두루뭉실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를 알아듣지 못한 루이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되묻기만 했다. 이에 우물쭈물거리며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최대한 덜 민망한 방향으로 루이즈를 이해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엘레오노르는 결국 붉어진 얼굴로 '노골적이면서도 비교적 온건해보이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그러니까... 유, 육체관계 말이야!" "네엣?!" 해당 표현을 사용한 엘레오노르는 물론이고 그것을 들은 루이즈의 표정도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루이즈나 엘레오노르나 이런 방면으로는 완전히 숙맥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어색함과 무안함만이 감돌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 다 부끄러움으로 인해 언성만 높이고 있었다. "크, 큰 언니는 왜,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에요?!" "시, 시끄러! 일단 묻는 말에나 대답해! 그러니까, 했어? 안 했어?" "아, 안 했어요! 안 했다구요!" "저, 정말이야! 정말로 안 했어?" "그, 그렇다니까요!" "정말로?" "제발 좀 믿어주세요!" "으흠..." 엘레오노르가 미심쩍어하면서도 더 이상 추궁을 하지는 않자 루이즈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침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거기에 자신을 난처하게 만든 질문을 꺼낸 엘레오노르에 대한 불만 때문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큰 언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저, 저는 그렇게나 절조없는 여자가 아니거든요? 부모님과 시조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할 생각 같은 건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짜고짜 저를 방까지 끌고와서는 느닷없이 그,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나 하고... 재정신이세요? 앗..." "..." 엘레오노르는 루이즈로부터 재정신이냐는 말까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뭔가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가차없이 보복이 돌아왔을 실언을 하는 바람에 아차 싶었던 루이즈도 엘레오노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금 더 배짱을 부리기로 했다. 엘레오노르가 자신에게 그러한 걸 물었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그러한 방향으로 의심했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는 루이즈에게 있어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게 그런 걸 물어본 이유가 혹시... '위기감' 때문인가요? 하긴, 언니는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신데 아직껏 사귄 남자가 없으시니... 저번에 모 백작님과의 혼사도 그쪽에서 거절했다고 하던데으아아아아아아-!" "안 듣고 있는 게 아니야!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아주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지?" "쟈, 쟈모해어요!(자, 잘못했어요!)" 무모하게 엘레오노르의 역린을 건드렸던 루이즈는 또 다시 엘레오노르에게 양쪽 뺨을 붙잡히고 말았다. 엘레오노르는 분이 풀릴 때까지 루이즈의 뺨을 좌우로 잡아당겼고, 그 때까지 루이즈는 응분의 보복을 당해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엘레오노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뺨을 문지르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루이즈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래. 솔직히 인정할게. 내게 너보다 결혼 상대를 늦게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나 질투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네게 그걸 물어본 건 아니야." "그, 그럼 뭔데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야. 대체 왜 네가... 저런 이상한 녀석에게 그렇게나 마음을 쏟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단 말이지." "네?" 엘레오노르로부터 자신의 파우스트에 대한 마음이 지적되자 루이즈는 아주 잠깐동안 이를 부인할까 고민했다. 물론 루이즈 자신은 파우스트에게 고백까지 한 이상, 이제와서 그에 대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사실이 엘레오노르의 귀에 들어가면 그것이 본가에 전해지고, 공작과 공작 부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두려웠던 것이었지만... 이내 루이즈는 그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후우...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여기고는 있지만, 나에게는 파우스트가 없어서는 안 돼. 설령 파우스트가 나를 후보로 취급한다고 해도, 난 그 곁에 있지 않으면 도저히 재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걸... 구차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의존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좋아.' 루이즈는 이미 지금껏 몇 차례나 파우스트와 멀어져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었다. 그럴 때마다 루이즈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었고, 이제는 다시는 그러한 비참한 기분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설령 부모님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만약 그렇다면 루이즈는 라 발리에르 가의 이름을 버릴 각오도 있었다. 물론 지금껏 자신을 봐왔던 부모님과 엘레오노르, 카틀레아를 가족으로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떠올릴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루이즈는 이미 한 번 귀족의 이름을 버렸던 적도 있었으니,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가족분들에게는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물론 내가 슈발리에도 아닌, 아무런 지위도 없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부모님께서도 적잖이 놀라긴 하겠지만... 계속해서 숨기는 것도 왠지 속이는 것 같아 꺼림칙한걸.' 루이즈가 이참에 자신의 파우스트에 대한 감정을 확실하게 밝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며 입을 열려던 차에, 엘레오노르가 먼저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제와서 그 허여멀건 월목 녀석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둥의 소리를 늘어놓으며 숨길 생각은 하지도 마." "...네?" "차인 줄 알고 절망한 나머지 가출까지 했다며? 그렇게까지 행동해놓고 이제와서 얼버무릴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겠지?" 엘레오노르는 루이즈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 중 하나였고, 거기에 그 사건과 연루되었던 파우스트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가 그녀가 속한 아카데미의 평의회 의장이었기 때문에 이번 일의 전말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얼버무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말하려고 했던 건데..." "어머, 그러니? 그러면 만약에 내가 그 사실을 아버님과 어머님께 알리려면 어쩔 생각이야? 그 두 분이 너와 저 허여멀건 월목의 교제를 허락할 것 같으니?" "어, 어떻게든 허락받을 거에요! 그리고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면... 전 라 발리에르 가의 이름을 버리겠어요!" "얘, 얘가 정말..." 루이즈의 말에 엘레오노르는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으나, 이내 체념의 정서가 깃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앞뒤 분간도 못하고 무모한 소리만 늘어놓는 너라면 왠지 그렇게 말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대체 뭣 때문에 그 허여멀건 월목 녀석에게 그렇게까지 빠지게 된 거야?" "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 녀석은 시건방지고 예의도 없는 막되먹은 녀석일 뿐이라고. 외모야 뭐... 어째 반년만에 멀끔해지기는 했다지만, 어찌되었든 말하자면 생리적으로 불쾌하다고나 할까... 솔직히 네가 좋아할 구석이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야." "..." "그래서 생각해본 가능성이 바로... 그, '그거'였어. 우, 우발적이든... 아니면 강제적이었든... 아, 아무튼 한 번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서 그 녀석에게 집착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야." "뭐, 뭐라구요?" 이 말을 들은 루이즈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아무래도 엘레오노르는 그 나름대로 루이즈를 걱정했기 때문에 그녀의 기준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파우스트에게 경계심을 품었고, 또한 그러한 파우스트에게 빠져버린 루이즈에 대해서 의아함을 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걱정을 해줬다는 사실은 내심 고마웠지만, 문제는 엘레오노르가 파우스트에 대해서도, 그리고 남녀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의 좁은 식견만으로 상황을 판단하려고 하다보니 그 생각의 결과물들이 상당히 극단적인데다 파우스트와 루이즈 자신에게 모욕적인 형태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망상이죠? 언니 말대로라면 파우스트는 성질 나쁘고 여자나 겁탈하는 남자가 되어버리고, 저는 겁탈당한데다 그렇게 몹쓸 남자에게 연정을 품은 한심한 여자가 되어버리잖아요! 정말 불쾌하네요! 솔직히 저는 언니의 그 사고방식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아요! 대체 어떤 여자가 자신을 강제로 범한 남자에게 연심을 품겠냐구요! 그런 터무니없을 정도로 천박한 발상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거죠?" "아, 아니... 일전에 본 소설이 그런 식의 내용이었는데..." 루이즈의 이 말에는 엘레오노르조차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했고, 결국 루이즈의 기세에 엘레오노르가 밀린다는, 매우 보기 드문... 아니, 사실상 사상 최초라고 해도 좋을 일이 벌어졌다. 루이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생각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서 당황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엘레오노르의 왜곡된 발상은 아무래도 통속 소설이 원인이었던 모양이었는데, 생각해보면 특유의 괄괄한 기질로 인해 혼사조차 거절당해서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이 있을리가 만무했던 엘레오노르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정보통이라고 해봐야 이 정도가 고작이긴 했다. 이쯤되자 루이즈는 엘레오노르에게 화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울 지경이 되었다. "후우... 이참에 확실히 말해둘게요. 파우스트는 분명 성질이 고약한 부분도 있고, 까탈스러운 구석도 있어요. 저 또한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파우스트를 생리적인 차원에서 불쾌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구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파우스트를 그렇게 생각했던 저 자신이 저주스러울 정도에요. 지난 1년 동안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저 자신도 많이 변화했었는데...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항상 파우스트가 있었어요." "흐음, 어떤 식으로?" "파우스트는 귀족이면서 제대로 된 마법조차 사용할 줄 모른다는 열등감에서부터 저를 건져주었고, 그렇게 새롭게 얻은 힘으로 인해 제가 헛된 공명심에 빠져 고집을 부릴 때에도 묵묵히 받아주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제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주었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도... 저 자신의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 위기에 놓였을 때에도 몇 번이나 저를 구해주었죠. 파우스트는 그 과정에서 많은 공로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아왔어요. 그것도 다 저 때문에... 사실 제가 세운 공로라는 것도 거의 대부분은 파우스트가 해준 일인걸요." "그건 마치... 뭐라고나 할까, 왠지 애정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책임감이나 죄책감으로 인한 속죄의 의미로 들리는데?" 잠자코 루이즈의 말을 듣던 엘레오노르는 그러한 평가를 내렸다. 여전히 파우스트가 못마땅했던 엘레오노르로서는 루이즈의 이야기를 조금 삐딱하게 받아들였던 것이었지만, 루이즈는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불쾌하다는 기색이 없이 대답했다. "네, 분명히 그런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전 그런 것 이상으로 파우스트를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다구요! 파우스트에 대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제 감정을 뒷받침해주는 정도일 뿐..." "으음, 뭐... 네 마음은 대충 알겠는데, 그 녀석은? "네?" "솔직히 그 녀석은 널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어. 아까도 말했었잖아? 너랑은 별 사이 아니라고 말이야." 사실 조금 전 엘레오노르를 격분시켜 루이즈를 방으로 끌고 오도록 만든 것은 루이즈가 이상한 남자에게 빠졌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 사실은 작년에 루이즈가 라 발리에르 가에 참전 허락을 받으러 왔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최근에 루이즈가 수도원으로 들어갔던 일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레오노르를 짜증나게 한 것은 파우스트의 루이즈에 대한 태도였다. 오해였다고는 하지만 가출을 결심할 정도로 자신에게 빠져있는 여자의 마음을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말하는 파우스트와, 또 그런 남자에게 목을 매는 루이즈 모두에게 답답함과 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엘레오노르의 생각을 알아차린 루이즈는 약간은 씁쓸함이 감돌지만 여전히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 자신이 없기는 해요. 정말 용기를 내서 고백했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여러 후보 중 하나'였을 때는 속상했죠." "뭐야, 대놓고 바람 피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글쎄요... 파우스트의 성격을 감안하면 여러 여자들에게 집적거린다기보다는 신중하게 생각해보겠다는 의미이겠지만요. 뭐,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후보라는 건 파우스트도 저와의 교제에 대해서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거 참... 너도 정말 속 편하게 생각하는구나." 루이즈의 거의 맹신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반응에 엘레오노르는 영 염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루이즈의 태도를 보면 어장관리에 낚인 호구(...) 그 자체와 마찬가지였기에 엘레오노르의 걱정이 이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파우스트는 어장관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관점과는 거리감이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걱정스러운 점도 있어요." "뭐, 뭐가 말이야?" "사실... 대융기의 징조가 발견되는 것으로 인해 성전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이후부터, 파우스트의 근심이 많이 심해졌어요." "..." 엘레오노르는 루이즈의 '걱정'이라는 것이 파우스트와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점이 아닐까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던 것이었으나, 그런 것이 아니라 파우스트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자 이제는 거의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루이즈는 그러한 엘레오노르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까지 성전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나 노력했었는데...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니 적잖이 허탈해진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저에게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인상이었어요. 아무래도 뭔가 나름대로 궁리를 하기는 한 모양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더라구요." "..." "그래서, 정말로 걱정스러워요. 어쩌면 이번에도 무척이나 무모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니 너무 불안한걸요." "...아, 그래? 그런데 나 보고 어쩌라고? 대체 언제까지 그 자식에 대해서 쫑알쫑알거릴거야!" "네에?" 결국 듣다 못한 엘레오노르는 루이즈에게 짜증을 부렸다. 엘레오노르로서는 파우스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소중한 여동생이 그에게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영 불쾌하다는 기분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이유'도 있었다. "아무튼! 난 피곤하니까 이제 잘 거야. 어서 침대 내 놔!" "자, 잠깐만요! 같이 자면 되잖아요!" "시끄러! 넌 그 녀석 방에나 가든지!" "네, 네에엣?" "뭘 그렇게 놀래? 아주 좋아 못견뎌 죽을 지경이라며? 그런데도 그 자식이 간이나 보고 있다면 차라리 그냥 네 쪽에서 그냥 덮쳐버리면 되겠네!" "그, 그게 대체 무슨 망측한 소리에욧!" "시끄러! 별 다른 지위도 없는 남자 따위에게 휘둘리기만 한다니, 라 발리에르 가의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아?" "언니가 말씀하시는 게 더 부끄러운 행동이잖아요!" 그렇게 루이즈와 투닥거리는 엘레오노르의 머릿속에는 어느 새 한 가지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하아, 내게는 어디 좋은 남자 없으려나...?' . . . 연중이 아닙니다! 제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 모든 분과,
그렇지 않은 분들이라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S : 제가 처한 상황상 적당할 짤방을 검색할 여유가 없어서 짤방은 생략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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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3,717장 분량이며, 원고 두께는 약 26cm 입니다.
1년 동안의 글을 문고판 시리즈로 낸다면 19권까지 낼 수 있겠네요. John님은 올 한해 이글루스에서 13,344번째로 게시물을 가장 많이 작성하셨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