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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47화 : 공손한 불청객.
얼마 전까지 파우스트 자신과 루이즈만이 살고 있었던 '해골들의 저택'에는 달리 갈 데가 없어진 샤를로트와 실피드, 엘자를 비롯한 북화단 기사단원이 둘이 새로 들어왔다. 이들에 이어서 샤를로트와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이유로 퀴르케가 들어왔고, 당분간 교사 일을 그만두고 오스트란트 호의 개조에 전력을 다하라는 왕정부의 명령을 받은 콜베르도 그녀의 손에 이끌려 왔다. 이렇게 인원이 늘어나자 파우스트는 요리를 담당할 주방장을 하나 새로 고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엘레오노르가 갑작스럽게 저택을 찾아왔다. 원래 거주하고 있던 아카데미 소속 연구원들의 기숙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융기'의 징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엘레오노르는 그녀 혼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용가마 마부를 포함한 수행원 5명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저택의 거주 인원은 순식간에 6명이 늘어나게 되었다. 아카데미에 출근하는 엘레오노르와 용가마 마부는 하루 중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저택에 없다고는 하지만, 저택에서 상주하는 인원이 4명이 더 늘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4명은 저택 내부의 청소나 정리와 같은 가사를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되었지만, 먹을 입이 늘어났기 때문에 주방장 한 명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파우스트는 새로 주방장을 보조할 요리사 한 명을 새로 고용해야만 했다. 파우스트는 이 비용까지 엘레오노르에게 청구할지를 고민했으나, 그녀가 데려온 하인들이 가사를 돕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자신의 자금을 사용했다. 엘레오노르가 들어온 이후 파우스트는 더 이상 해골들의 저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엘레오노르가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난 날의 정오 무렵, 곧 점심 식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해골들의 저택의 2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에 멍하니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던 파우스트는 자신의 방 창문을 두들기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응?" 그 소리에 파우스트는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풍경 이외에는 달리 없었다. 하지만 창 밖에서부터 어떤 생물의 영혼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파우스트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흐음, 전서구라도 온 모양인가?' 파우스트가 창가까지 걸어가 창문을 열자, 그의 예상대로 창문 밖에 걸터앉아 창틀을 부리로 쪼고 있던 전서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전서구는 기다렸다는 듯 날개짓을 하며 창 안으로 날아들어오더니 파우스트가 앉아있는 의자 앞의 테이블에 가만히 착지하고는 편지가 들어있는 가느다란 통이 묶여있는 왼쪽 다리가 파우스트의 정면으로 향하도록 몸을 돌렸다. 파우스트가 통의 뚜껑을 열어 편지를 꺼내자, 전서구는 기다렸다는 듯 날아올라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전서구가 날아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파우스트는 그것이 가져온 편지의 겉봉을 확인했다. 겉봉에는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의 이름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흐음,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라... 그 대머리에게 온 건가?' 겉봉을 확인할 때만 하더라도 파우스트는 그 편지가 콜베르에게 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이유가 딱히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해당 학원의 교사인 콜베르에게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편지의 겉봉의 맨 아래에 쓰여있는 수취인은 콜베르가 아닌 파우스트 자신이었던 것이다. '응? 내게 보낸 거라고? 뭣 때문에?' 학원에서 자신에게 용건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파우스트는 의아함으로 눈가를 찡그리면서 편지를 펼치고는 그 내용을 읽었다. 편지를 보낸 것은 학원장 오스만이었는데, 그 내용 자체는 매우 간단했다. '뭐야... 티파니아 녀석을 이곳으로 보냈다고? 아니, 대체 왜?' 편지 자체는 매우 짤막한 내용 뿐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우선은 편지의 글귀가 '보낼 것이다.'라는 미래형 문장이 아니라 '보냈다.'는 과거형 문장으로 작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티파니아를 보내놓은 상태에서 그 사실만을 통보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파우스트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신경쓰이는 점은 어째서 티파니아를 이곳으로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조금도 설명되어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자신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티파니아를 여기로 보냈다면 최소한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이유라도 설명을 해야 할 터인데, 이 편지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적혀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다못해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라도 적혀있었으면 파우스트도 학원측의 일방적인 일처리에 대해서 조금은 수긍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파우스트로서는 살짝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바로 그 때, 저택 안마당 쪽에서 뭔가 육중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우스트는 바로 요 며칠 전에도 이것과 거의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가구를 모조리 챙겨왔던 엘레오노르 때와 비교하면 덜 둔중한 소리이긴 했지만, 아무튼 단순히 내려앉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 무거운 생물이 몸을 움직이는 듯한 이 소리는 틀림없이 용가마가 지면에 안착할 때에 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뭣이? 벌써 왔다고?' 티파니아가 자신의 저택에 찾아온다고 한들 파우스트는 딱히 그녀를 위한 환영 준비를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곧 점심시간이 되고 두 명의 요리사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 한 명이 늘어난다고 해봐야 한 자리를 더 마련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기 때문에 영 못마땅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용가마에서 내린 티파니아가 커다란 가방을 든 채 긴장한 기색으로 현관문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후우... 뭐, 하는 수 없나.' 거창한 환영 파티를 열 생각이 아니라고 해도, 저택의 주인으로서 집에 찾아온 손님(비록 불청객이라 해도.)을 무시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에다 티파니아는파우스트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파우스트라 해도 그녀를 문전박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방에서 나와 1층의 중앙 홀과 연결되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자, 이미 티파니아의 등장을 확인한 저택 내부의 다른 사람들이 현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창문을 통해 티파니아가 용가마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퀴르케였다. "어머, 티파니아까지 여기에 올 줄이야. 학원에서 용가마까지 준비한 걸 보니 뭔가 사정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나의 쟝, 혹시 여기에 대해서 아는 건 있나요?" "글쎄, 당분간 학원과는 상관이 없어진 나로서는 잘 모르겠군. 그보다, 미스 체르프스트. 그 호칭은, 뭐라고 해야 하나... 조금 삼가주면 안 되겠나?" "죄송해요. 그건 무리랍니다~♡" "..." 아무리 봐도 이 두 사람의 관계의 주도권은 퀴르케가 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콜베르는 퀴르케에게 딱히 흑심을 품고 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달라붙으려는 그녀를 상대하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어울려주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루이즈. 최근 들어서 이 저택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느낌이지 않아?" "그야 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렇기야 하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렇게 늘어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다 여자잖아? 나와 샤를로트, 북화단 기사단원 둘과 너의 큰 언니 및 메이드들에 이르기까지... 쟝과 고용된 요리사 둘을 제외하면 전부 다 여자야." "...우, 우연이야." 짓궂은 표정으로 얼굴에 가학성을 드러낸 퀴르케의 의도를 짐작한 루이즈는 애써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이미 발동이 들어간 퀴르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연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문제야? 넌 기껏 큰 마음을 먹고 고백까지 했는데, 그 녀석으로부터 확답도 못 들었잖니? 그래서 적잖이 불안할 텐데, 매정한 그 이의 주변에는 점점 다른 여자들이 몰려들고... 아핫, 물론 난 아니니까 쓸데없는 경계하지는 마. 내게는 쟝 뿐인걸." "으읏...!"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루이즈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그녀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었던 직접적인 고백의 결과물이 '연애 대상으로서의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식의 반쪽짜리 대답이었던 것으로 비롯된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파우스트가 루이즈에게 조금도 '가능성'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이 정도라고 해도 진전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파우스트가 '다른 후보'라는 말을 꺼냈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파우스트가 다른 여자들에게 딱히 관심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퀴르케의 말에 동요하고 말았던 것이다. "거 참, 밖에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뭘 그렇게 떠들고 있어?" 그렇게 퀴르케가 루이즈를 놀려먹고 있을 때, 파우스트는 그런 말을 하면서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퀴르케가 주도하는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 것은 파우스트에게 있어서 낯간지러운 일이었기에 훼방을 놓고 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절한 구실도 없이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려고 했다가는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해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꺼낸 것이다. 파우스트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티파니아의 방문이 도움이 된 셈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중단시킨 파우스트는 현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난처한 기색으로 쭈뻣쭈뻣 거리며 어색하게 서 있는 티파니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한 티파니아의 모습은 그녀가 원래 소극적인 성격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여기에 오게 된 것 자체가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 서둘러 보냈다는 사실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옷차림새는 교복 복장이었다. "어서 들어오지 않겠어? 기껏 여기까지 찾아 왔으면서 가만히 서 있을 건 없잖아." "아, 응..." "이제 곧 점심 식사준비가 다 되어가는 모양이니, 네가 여기에 오게 된 사정에 대해서는 같이 식사라도 들면서 이야기 하자고." "응, 그럼 실례할게." 그리고 잠시 후, 저택의 1층에 위치하는 식당으로 저택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카데미로 출근한 엘레오노르와 용가마 마부, 그리고 북화단 기사단원 두 명을 제외한 주요 인물들이 원탁에 앉았고, 엘레오노르가 데려온 메이드들이 음식을 날라오고 있었다. 저택의 식당에 배치된 테이블이 일반적인 귀족의 저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긴 테이블이 아니라 원탁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그 모양이 같은 원탁에는 상석(上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재 파우스트는 이 저택의 주인이므로 긴 테이블에서는 상석에 앉게 되겠지만, 파우스트는 '자신이 귀족들이나 따지는 자리의 높낮이 개념에 구애되는 것'이 싫었다. 비록 무작정 귀족을 혐오하던 시기는 지나갔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파우스트는 스스로가 귀족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귀족의 사생아라는 출생 과정에서부터 생츄어리와 이 세계의 귀족들에 의해 겪었던 온갖 괴로운 경험들은 파우스트에게 있어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지금껏 몇 차례나 귀족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해서 거절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 귀족이든 아니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성전에 휘말리게 될 거라는 점은 똑같으니까 말이야. 이종족간에 벌어지는, 살아갈 땅을 놓고 벌이는 전쟁이기 때문에 그 양상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할 거라고. 여기에서 지게 되는 쪽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터... 빌어먹을, 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싸움의 원인이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린 이상, 이대로 성전이 벌어진다면 인간이나 엘프나 상대 종족을 몰살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려 할 것이 분명했다. 양쪽 모두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라 성전은 기정 사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지금껏 성전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던 파우스트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세계의 수호자 넬우얼과의 대화는 이러한 파우스트를 더더욱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넬우얼이 한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성전이 인간이나 엘프라는 종(種)의 멸망을 넘어 세계 그 자체의 멸망의 전조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안 그래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태인 성전의 위험성을 더더욱 가중시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물론 넬우얼은 과거에 있었던 일의 실마리에 대한 힌트를 알려주었고, 그것을 위해 파우스트에게 엘프들이 사는 땅으로 찾아갈 것이라는 앞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적의 본거지로 찾아가라는 말은 그냥 죽으러 가라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설령 이야기가 잘 풀려서 과거의 일에 대한 실마리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6천년 전에 있었던 인간과 엘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원인에 대해서 알아낸다 하더라도, 지금 양측이 처한 상황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으므로 사이좋게 화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후우... 내가 뭐 역사가도 아니고, 과거에 있었던 일의 진상만을 파악하기 위해 엘프를 찾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하지만, 트랑굴과 같은 존재인 넬우얼이 내게 직접 찾아와서 이러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건... 그런 역사적 사실 이외에 달리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기는 해. 하지만 문제는 그게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고, 그 불확실한 이유로 내가 저 위험한 장소에 발을 들여놓는 건 좀...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정말 내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지금까지 파우스트는 온갖 위험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적어도 그럴 때에는 뭔가 확실하고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생츄어리에 있을 때에는 지옥의 3대 군주를 쓰러뜨리고 동료 라스마의 사제들이 인정받도록 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이 세계로 소환된 이후에도 자신의 생존이나 다른 사람들(특히 루이즈)의 목숨, 혹은 다른 누군가가 초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는 눈에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성전과 그로 인해 야기될 세계 멸망의 위기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방도가 서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분명하지 않았고, 설령 그것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고작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파우스트의 고민은 넬우얼과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거듭되며 그를 괴롭혀왔던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령에 빠져드는 느낌이었지만, 파우스트도 지금은 여기에 대한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식사를 마무리하고는 홍차를 마시면서 티파니아와 최근의 근황에 대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파우스트가 개별 접시에 덜어놓은 음식을 조금 남겨둔 채 식기까지 내려놓고는 깊은 고심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시선이 모였던 것이다. '정말이지,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더 골치만 아파지는 일이로군. 하지만... 내가 이야기 하자고 식사에 불러 놓았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기는 하겠어.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순 없겠지.' 결국 파우스트는 다시 식기를 들고 접시위에 올려져 있는 음식을 적당히 목구멍으로 넘긴 뒤, 티파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이거 실례. 잠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야. 그럼, 본래 하려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지." 파우스트는 자신의 고민에 대해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대충 얼버무리고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했다. 최근들어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루이즈가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낌새가 느껴졌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시키는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솔직히 아까 전에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에서 편지가 날아왔을 때에는 무척 놀랐다고. 편지에 뭐라고 쓰여있었던 줄 알아?" "그, 글쎄...?" "그 편지에는 '너를 내 저택으로 보냈다.'라는 내용이 전부였어. '보내겠다.'도, '보낼테니 준비해달라.'도 아니고 말이야. 하아, 정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어. 내 양해는 조금도 구하지 않고 무턱대고 너부터 보내놓은 다음, 그제서야 기억났다는 듯 부랴부랴 편지를 휘갈겨서 보냈다는 거잖아? 그게 전략적인 성공을 위해서 기습적인 침공을 시작한 직후에 구색을 갖추기 위해 보내는 선전포고문이었다면 차라리 이해는 할 수 있었겠지만, 이건 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하하..." "또한 그 편지에는 어째서 너를 저택으로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조금도 되어있지 않았어. 아무래도 급하게 진행될만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상황에 대한 설명 정도는 있었어야 하잖아? 거기에 더욱 가관인 것은 그 편지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네가 도착했다는 거야. 정말이지, 대체 이럴거면 그 늙은이(학원장 오스만)는 뭐하러 편지를 보냈는지 모르겠군." "아하..." 파우스트는 영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학원측의 행동에 대해서 투덜거렸다. 물론 파우스트도 티파니아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그의 투덜거림은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는 식이 아닌, 불쾌한 일을 겪은 것에 대해서 일종의 하소연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듣고 있던 티파니아는 자신이 조금 전 겪었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네가 그렇게 불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확실히 오늘은 모든 절차에 있어서 지나치게 서두른 감이 있었거든. 수업을 듣던 도중에 갑자기 선생님 한 분이 날 찾아오시더니 최대한 빨리 짐을 싸라고 하셨고, 대체 무슨 일인지 사정에 대해서 듣고 있으려니 어느 새 마당에 용가마가 준비되서 그걸 타고 여기로 왔으니까 말이야." "흐음, 일의 경과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널 이 저택으로 보내는 것은 학원 측의 예정에도 없었던 모양이로군. 그럼 대체 누가 널... 내 저택에 보내도록 시킨거지?" 파우스트는 상황을 말로 정리해가며 티파니아에게 이번 일을 주도한 배후에 대해서 물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짐작이 갔다.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은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기관인 만큼 기본적으로 학생들을 규율로써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물론 그들의 학부모인 귀족들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어지간한 귀족의 입김은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입장인 학원이 예정에도 없던 일을 위해 그렇게나 급하게 움직였다는 것은 '트리스테인에서 가장 권위있는 집단', 즉 왕궁의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파우스트도 여기까지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여기에 대해서 티파니아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기도 했지만, 자신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대화를 그대로 진행했다.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여왕 폐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셨다는 모양이야." "역시나... 그런데, 무슨 이유로?" 파우스트는 티파니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가도록 한 사람이 앙리에타라는 점은 금방 파악했지만, 앙리에타가 어떠한 이유로 티파니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보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대화의 맥을 끊어버리는 것보다는 티파니아가 그녀가 여기로 온 이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파우스트가 멍석을 깔아주자, 티파니아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알비온 왕가의 바람의 루비'를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너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이제 성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또 강력한 엘프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완전한 허무의 힘이 필수적...이지? 그래서 여왕 폐하께서는 가능한 한 '네 가지 넷'을 한데 모아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야." "호오, 그래?" 앙리에타의 지시 자체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렇게나 급하게 서둘러 행동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가지 넷이 모인다 한들, 어차피 교황과 줄리오, 그리고 갈리아의 허무의 사용자 '후보' 겸 '가짜 샤를로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조제트까지 모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모두 모이게 될 때와 장소는 실제로 성전이 일어난 이후의 전장이 될 터였다. 거기에 대해서 파우스트가 의문을 품었을 때, 티파니아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더 이야기했다. "물론 교황 성하와 줄리오, 그리고 갈리아의 허무의 사용자 후보인 조제트는 저마다 수행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끼리 같이 지내는 정도가 되겠지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여기서 해야할 중요한 일이 하나 있어. 아마도 그게 다른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유인 모양이야." "호오, 그게 대체 뭐길래 꼭 여기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거지?" "사역마 소환." "...뭐?"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네 가지 넷'은 4개의 비보, 4개의 루비, 네 명의 사용자, 그리고 네 명의 사역마를 의미하는 것인 만큼, 네 가지 넷이 모두 모인다는 것은 티파니아 또한 사역마를 소환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직 '후보'에 불과한 조제트는 둘째로 치더라도, 허무의 사용자 중에서 아직껏 사역마를 소환하지 않은 건 티파니아 뿐이었으므로 그녀가 사역마를 소환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학원에서는 매년 봄에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춘 사역마 소환의식을 하기는 하지만, 내게 있어서 그건 내년 봄의 일이니까 그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렇다고 나만 먼저 사역마를 소환하면 다들 이상하게 여길 게 분명하고, 또한 나의 사역마로 나오게 될 존재는 다른 허무의 사역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될 테니까 설명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하긴, 그래. 확실히 학원에서 네가 사역마를 소환하는 건 이래저래 문제가 되는 점이 많을 것 같군. 쓸데없이 떠들기 좋아하는 귀족 애송이들이 화젯거리로 삼기에는 충분한 일이니 무척이나 귀찮게 굴겠지." "그렇겠지?"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퀴르케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티파니아의 소환에 불려오게 되어 '계약'하게 될 사람은 대체 어디의 누가 될까? 궁금하지 않니?" "물론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건 소환이 끝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니까..." "어머, 그렇게 태평한 소리가 나올 상황이 아닐텐데? 넌 걱정되지도 않아?" "거, 걱정?" 지금 퀴르케가 짓고있는 짓궂은 표정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는 그녀가 조금 전 한 말에 포함되어 있었다. 퀴르케의 의도를 파악한 파우스트는 조금 거북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고, 샤를로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뀨이! 아, 그거 혹시..." "잠시 가만히 있어줘." "뀨이." 심지어 실피드조차 퀴르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서 뭔가 말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사전에 퀴르케에게 제지당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티파니아는 '걱정'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혼자 생각하더니 나름대로 여기에 대해서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으음... 확실히 걱정스럽기는 해. 어떤 사람이 내 사역마로 소환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마법을 통해 내 앞으로 불려나와서는 다짜고짜 성전에 참가하는 핵심적인 중책을 떠맡게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럽고 또 죄송하다는 생각도 들어." 이 대답은 상냥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풍부한 티파니아다운 말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퀴르케가 의도했던 부분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아직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사역마가 될 사람에 대해서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는 티파니아의 순진한 반응에 퀴르케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어, 어머나! 넌 어쩜 애가 이렇게나 기특하니! 자기 자신이 처하게 된 상황보다도 거기에 말려들 다른 사람의 걱정을 하다니 말이야!" "그, 그게 이상한 걸까?" "그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 자신이 걱정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어?" "나 자신이? 으음... 아!" 퀴르케의 말에 다시금 생각에 잠긴 티파니아는 잠시 후 자신이 방금 떠올린 부분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 어쩌면... 사역마로 소환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엘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뭐, 뭐어? 풉!" 자신이 의도한 바를 알아차리기는 커녕, 점점 더 참신한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해나가는 티파니아를 보고 있으려니 퀴르케는 점점 더 웃음을 참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바로 그 때, 루이즈도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이야기 말이야,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전에 파우스트와 데르플링거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에 따르면, 시조 브리미르의 사역마는 엘프 여자였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어머나, 그게 정말이야?" "응, 그래." "으음... 만약 그렇다면 난 정말 당혹스러울 것 같아. 난 아직까지 어머니 이외의 다른 엘프들과 만났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엘프와 인간의 혼혈인 나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 그럴까? 뭐, 생각해보면 엘프들도 우리가 성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테니까..." "푸,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 식으로 티파니아와 루이즈가 이 주제를 붙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결국 더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 퀴르케가 마침내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퀴, 퀴르케?" "갑자기 왜 그래?" 티파니아와 루이즈는 어째서 퀴르케가 웃기 시작했는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이러한 두 사람으로 인해 한동안 배를 움켜쥘 정도로 거하게 웃었던 퀴르케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는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하아... 너희들 정말이지... 뭘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지적하려던 건 그런 부분이 아니잖아?" "어, 이것도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지! 애당초 난 엘프가 사역마로 소환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구. 아무튼 정말 너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순진한 아이로구나." "어, 어? 그럼 뭐지?" 티파니아가 다시 퀴르케가 한 말의 의도에 대해서 궁리해보려고 할 때, 루이즈가 퀴르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저기, 퀴르케? 그렇게 노골적으로 비웃기만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아? 만약 정말로 엘프가 티파니아의 사역마로 불려온다면..." "뒷북치지 마, 루이즈.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끝났잖아. 화제가 바뀌면 새로운 화제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대화법이야. 이미 끝난 이야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며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건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안쓰러운 사람들의 행동이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에 그렇게 행동하면 미움당할거야." "하, 하지만..." "그리고 어차피 티파니아의 사역마로 누가 선택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야. 그러니 사역마가 될 누군가에 대해서는 소환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지금부터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해봐야 쓸데없는 시간낭비일 뿐이라구." "윽..." 갑자기 정론으로 밀어붙이는 퀴르케에게 압도당한 루이즈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영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보아 루이즈는 아직도 티파니아의 사역마로 엘프가 소환될 가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었고, 쓸데없이 성실할 정도로 진지하게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티파니아 역시 여전히 헛다리를 집는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이야... 티파니아는 그렇다 치더라도 루이즈까지 진짜 눈치가 없네. 뭐, 여태껏 티파니아가 헤매면서 아둥바둥거리는 모습은 충분히 즐겼으니까 슬슬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지금부터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되니까 말이야.' 지금까지 티파니아가 어떻게든 생각해보려고 머리를 굴리는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던 퀴르케는 이제 티파니아가 진실을 알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티파니아, 아직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어?" "...미안, 전혀 모르겠어." "루이즈, 너도 아직 모르겠어?" "몰라. 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으음, 정말이지 너희 둘은 어쩜 이렇게나 기적적으로 순진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할 정도야. 뭐, 그럼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네. 그렇긴 하지만... 티파니아, 정말로 말해버려도 괜찮겠어?" "이제와서 그렇게 말하면 궁금해지잖아. 어서 말해줘." "알았어. 그럼 이야기할게."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티파니아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퀴르케는 티파니아가 이제껏 떠올리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이 소환되든 엘프가 소환되든 그건 지금의 시점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누가 소환되었느냐와는 상관없이 넌 그 상대와 계약을 해야 하잖아. 그걸 위해서는 '계약의 의식'을 실행해야 하는데..." "...아!" "그, 그건...!"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루이즈와 티파니아는 퀴르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메이지와 사역마로 소환된 존재와의 계약은 키스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티파니아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와 키스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역마의 소환의 경우에서는 인간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인 엘프가 아니라 환수가 소환되므로 설령 입맞춤을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별 다른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허무의 사용자 티파니아가 소환하게 될 상대는 인간, 혹은 엘프가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사역마와의 계약 의식이 키스라는 것은 루이즈나 티파니아나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특히 이미 두 번이나 사역마를 소환했던 경험이 있는 루이즈로서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루이즈나 티파니아나 대융기의 징조가 발견된 이후 각국에서 성전의 준비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던 바가 컸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루이즈는 최근 들어서 파우스트가 뭔가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거기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거,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 그, 그런데...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나, 난 대체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에 대해서 일종의 로망을 품고 있는 소녀에게 있어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키스를 해야만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기 마련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는 티파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러한 말을 입에 담은 티파니아의 표정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티파니아가 사역마를 소환해야만 한다는 것은 정해진 절차였고,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으으으,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으음..." 졸지에 첫 키스를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상납하게 된 티파니아는 너무나도 불쌍할 정도로 난처해하고 있었고, 루이즈는 여기에 대해서 뭔가 위로를 하려고 했으나 마땅한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티파니아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이야 루이즈는 자신이 사역마로 소환한 파우스트에 대해서 매우 강렬한 애정을 품고 있지만, 처음 소환했을 당시에 그녀는 지금의 티파니아 못지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소환 당시의 파우스트는 지금보다도 더 거칠었고, 외모조차도 흉할 정도로 삐쩍 말랐던데다 이 세계에서 불길을 상징하는 오드아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 때의 기억이 과거에 대한 미화라는 뇌내변환작용을 통해 '아련한 첫 키스의 추억'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루이즈가 티파니아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퀴르케는 조금 더 티파니아를 놀리고 있었다. "뭐, 하지만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야 할까? 어쩌면 티파니아도 루이즈가 그랬듯 자신의 사역마랑 아주 긴밀한 사이가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닐까?" "글쎄,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허무의 사용자와 그 사역마는 대체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어? 지금 여기 있는 반쪽 커플도 그렇고, 지금은 고인이 된 조제프 왕과 그 인형놀이하던 여자도 그랬고, 또 교황 나리랑 줄리오도 그렇고 말이지." "으으으... 그,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곤란한걸... 나, 나도 나름대로 희망하는 만남의 형태라는 게 있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티파니아의 표정은 어두워져갔지만, 문제는 그러한 점은 티파니아가 스스로 감수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결국 여기에 대해서는 콜베르가 교사의 입장에서 나서게 되었다. "흐음... 미스 웨스트우드에게는 애석한 일이다만, 컨택트 서번트 주문은 메이지가 서몬 서번트 주문으로 연 소환 게이트를 통해서 들어온 자에 한해서만 가능하며, 또한 일단 소환 게이트를 통하여 소환된 자가 있는 한 새로 소환 게이트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네. 그렇기에, 새로 소환을 하려면 상대를 죽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겠지. 그러니... 나로서는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 이외에는 할 수가 없겠군." "네..." 결국 콜베르가 티파니아에게 사역마의 소환에 대해서는 그녀 스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콜베르는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정도 전에 재소환을 요청했던 루이즈에게도 이러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임은 분명했다. 한편, 티파니아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즐길 생각이었던 퀴르케는 티파니아가 너무 안쓰러울 정도로 낙담하는 모습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긴 하지만 퀴르케는 그 어조가 다소 짓궂은 형태이기는 했지만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 그것도 앞으로 티파니아가 감수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으므로 딱히 잘못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결국 퀴르케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조금 가벼운 방향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아, 그나저나 사역마 소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교황 나리도 계약을 위해서 자신의 사역마인 줄리오와 키스를 했다는 거겠지?" 정통한 왕조도 아니고 종교적으로 엄격하지도 않은 게르마니아 출신인 퀴르케는 교황을 비꼬는 듯한 칭호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쉽게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의 지적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퀴, 퀴르케! 그게 대체 무슨 불경한 소리야?!" "뭐 어때서? 솔직히 난 교황이라고 해서 딱히 경외심이 드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줄리오를 사역마로 데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키스까지 했다는 거잖아? 그것도 남자들끼리." "으읏..." "아우우..." "...(///)" "..." "어, 어흠." 이 이야기를 들은 루이즈와 티파니아, 그리고 샤를로트를 비롯한 여성진들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했고, 그에 반해서 파우스트와 콜베르로 구성되어있는 남성진은 이 화제에 대해서 굉장히 거북해하면서 애써 외면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주변의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퀴르케는 점점 더 노골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생각해보면 정말 흥미로운 일이지 않아? 아무리 계약을 하기 위해서 키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 치고 교황 나리랑 줄리오는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 보이잖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두 명의 남자들이 이 이야기를 거북하게 생각하듯, 서로를 불쾌하게 여기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말이야." "그, 그런가...?" "그, 글쎄... 그냥 같이 일을 하다보니 가까워지게 된 거 아닐까?" "..."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줄리오나 교황이나 둘 다 멀끔하게 생겼으니까 어느 정도 그림은 나오는 것 같지? 만약 둘 다 외모가 엉망이었다면 진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야." "그, 그건... 그렇긴 하지만..." "으음..." "..." "아무튼, 어째 그 두 사람은 망상의 소재로 삼기에 딱 좋은 것 같지 않아? 이를테면...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도 못하던 남자 두 명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기묘한 인연으로 사로를 만나게 되어 키스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피차간에 당혹스러워했지만, 이윽고 결심한 듯 서로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얼굴을 가까이 하여 입술을 맞댄다. 그리고 그 키스를 통해 서로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침대로..." "...(///)"×3 퀴르케의 '알파벳 두 글자(...)'로 표현해야 할 내용의 이야기에 여성진들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어느 정도 흥미를 가지는 느낌이었다. 이는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가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주제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긴 했지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남자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 그러고보니 오스트란트 호의 엔진 정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군... 이거,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 콜베르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기 거북했는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식당에서 빠져나갔고, 파우스트 역시 그 뒤를 이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지 아는 사람의 알아서는 안 되는 일면을 보고 말았다는 기분과 함께 말이다. . . . 당일 저녁 식사 이후, 파우스트는 자신의 방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낮에 있었던 대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막바지에 펼쳐졌던 소녀들의 망상 대폭주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티파니아가 자신의 저택에 오게 된 이유와 그 경과에 대한 내용에 관한 생각이었다. 참고로 티파니아는 퀴르케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사역마를 소환하는 것에 대해서 다소 망설이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결심을 하는 데에는 며칠 정도의 시간이 더 소요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파우스트가 고심하고 있던 내용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티파니아가 여기로 온 이유는 가능한 한 네 가지 넷을 한데 모아두는 편이 낫다는 여왕의 판단으로 인한 것이었어. 그 네 가지 넷이 모여야 할 이유라는 건... 역시 성전 때문이라는 거잖아. 후우... 정말로 웃기는 일이네. 지금껏 내가 얼마나 성전을 막기 위해서 노력해왔는데,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우울하기 짝이 없어. 거기에다 넬우얼로부터 성전이 세계 멸망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까지 듣게 된 뒤로는 더더욱 골치만 아파오고...' 현재 파우스트의 고민은 최근들어 파우스트가 늘상 빠져있는 고민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앙리에타가 자신의 양해도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티파니아를 자신의 저택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파우스트로 하여금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어버린 성전으로 인해 한없이 휘둘리기만 하는 그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더더욱 침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후우... 이 모든 건 전부 다 대융기라는 현상 때문이야. 그것만 아니었어도 지금의 교황은 갈리아의 왕을 바꿔치기할 정도로 과도한 내정간섭이라는 명목으로 퇴임되었을 공산이 컸었지. 그렇게만 되었다면 성전을 진행하려는 수괴가 권한을 잃고 사라진 셈이니 성전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이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물론 그 일로 인해 교황이 퇴임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파우스트는 그러한 상황을 대비해서 '한 가지 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 계책이라는 것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일종의 도박이기는 했지만, 만약에 성공한다면 교황의 '네 가지 넷'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히 약화시켜 그가 성전을 준비하는 데에 차질을 빚도록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사실 그 계책은 아직도 '실행 단계'에 놓여있었고 더 진척시키는 것도 가능한 상태였지만, 이미 대융기로 인해 성전을 막을 수 없는 지금의 단계에서는 그 계책을 실행한다고 해봐야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파우스트도 이 계책에 대해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솔직히 그 계책을 실행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기는 해. 관점에 따라서는 교황에 대한 일종의 분풀이 같은 거라서 치졸하게 여겨지는 감도 있고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교황이 주도해나가는 이 상황에 수동적으로 이끌려가기만 하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리고 사실 내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변수를 하나 정도라도 더 확보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결국 미리 준비를 해두었던 계책을 시도하기로 결심한 파우스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의 행선지는... 티파니아가 머물 수 있도록 빌려준 방이었다. -------------------------------------------- 지난 화와의 시간적 간격에 비해서 글이 짧은 것은 아이들을 가르쳤던 기간동안 받아뒀던 애니메이션 감상+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대량으로 구매했던 만화&라이트노벨의 탓이 결코 아닙... ...죄송합니다. 거짓말이에요. 상기한 이유가 맞습니다.(...) |